족보
  • 윤언이(尹彦頤)
  • 파평윤씨(坡平尹氏),  출생~사망 : ? ~ 1149
고려의 문신. 호는 금강거사(金剛居士). 문하시중을 지낸 관(瓘)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 인종 때 기거랑(起居郞)이 되어 좌사간(左司諫) 정지상(鄭知常), 우정언(右正言) 권적(權適) 등과 정치의 득실을 논하여 왕으로 하여금 실시하도록 하였다. 1128년(인종 6)에 예부시랑으로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국교 수립을 청하고 돌아왔다. 1132년에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 정항(鄭沆), 정지상 등과 경연(經筵)에 나아가 경의(經義)를 강론하고 상으로 화서대(華犀帶)를 하사받았다. 일찍이 예종 때 아버지 관이 왕명을 받들어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의 비문을 지었는데, 그 글이 좋지 못하므로 그 문도(門徒)가 은밀히 왕에게 말하여 김부식(金富軾)을 시켜 다시 짓게 하자 그는 사양하지 않고 다시 지었으므로 그 때문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1133년 왕이 김부식에게 '주역'을 강론하고 윤언이에게 이를 묻고 논란하게 하였는데, 이때 '주역'에 매우 정통하였으므로 정연한 논리로 반박하여 김부식으로 하여금 대답이 궁하게 하였다. 1135년 묘청(妙淸)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원수(元帥) 김부식의 막료로 출정하여 서경을 함락시키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정지상과 내통하였다는 김부식의 보고로 양주방어사(梁州防禦使)로 좌천되었다가 뒤에 광주목사(廣州牧使)가 되었다. 이때 왕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것과 지난날의 자신을 해명하는 글을 올렸다. 1148년(의종 2) 정당문학(政堂文學), 판형부사(判刑部事)가 되었다. 예종, 인종 양조에 걸쳐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고, 특히 '주역'에 밝았다. 말년에는 불교를 매우 좋아하였고 은퇴하여서는 파평(坡平: 坡州)에서 살았으며, 중 관승(貫乘)과 친교가 있었다. 아들 3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으므로 이때문에 그 처에게는 나라에서 상을 내려 매년 녹(祿)을 주었다. 저서로는 '역해 易解'가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