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최응(崔凝)
  • 황주최씨(黃州崔氏),  출생~사망 : 898 ~ 932
고려의 문신. 대상(大相) 우달(祐達)의 아들이다. 어머니가 임신하였을 때 그 집 오이줄기에 갑자기 참외가 맺히므로 이웃사람이 이를 궁예(弓裔)에게 고하니 궁예가 점쳐 '생남하면 나라에 불리하니 기르지 말라. ' 하였으므로 부모가 숨겨 길렀다. 오경(五經)에 통하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궁예가 '이른바 성인(聖人)을 얻는다 함은이 사람이 아닌가!'라고 할 정도로 신임을 얻었다. 915년(신덕왕 4)에 궁예가 왕건(王建)을 불러들여 이른바 관심법(觀心法)을 가지고 모반의 누명을 씌울 때 이를 변명하자 그가 장주(掌奏)로 그 자리에 있어서 일부러 붓을 뜰에 떨어뜨린 다음 이를 주우려고 뜰에 내려가 왕건에게 '굽히지 않으면 위태롭다. '라고 귀띔해주어 화를 면하도록 하였다. 왕건이 고려를 세우자 지원봉성사(知元奉省事)가 되었다가 광평낭중(廣評郞中), 내봉경(內奉卿), 광평시랑(廣評侍郞)을 역임하며 태조의 총애를 받았다. 항상 재계(齋戒)하고 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병들어 누웠을 때 태조가 동궁(東宮)을 보내어 병문안을 하고 육식(肉食)을 권하며 말하기를 '다만 손수 죽이지 않으면 될 것이지 고기를 먹는 것이야 무슨 해가 되리오. '라고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먹지 않으니 태조가 그 집에 행차하여 이르기를 '경이 육식하지 않으면 두가지 손실이 있으니 그 몸을 보전하지 못하여 끝까지 어머니를 봉양하지 못함이 불효요, 명(命)이 길지 못하여 나로 하여금 일찍 좋은 보필을 잃게 함이 불충이라.'고 하니 이에 비로소 고기를 먹어 병이 나았다고 한다. 또 태조가 '옛날 신라가 9층탑을 세워 삼국을 통일하였으니 개경에 7층탑을 세우고 서경에 9층탑을 세워서 삼한을 합하여 일가를 삼고자 하나니 경은 나를 위하여 발원소(發願疏)를 지어달라.'고 하자 이에 따랐다. 죽은 뒤 대광 태자태부(大匡太子太傅)가 증직되고 뒤에 다시 사도(司徒)가 증직되었으며,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희개(熙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