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최루백(崔婁伯)
  • 수원최씨(水原崔氏),  출생~사망 : ? ~ 1206
고려의 문신, 효자. 수원의 호장(戶長) 최상저(崔尙翥)의 아들이다. 출생년대는 1104년생 설과 1110년생 설이 있으며, 1206년 1월 11일 사망하였다.

15세 때 아버지가 사냥하다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자 그 호랑이를 죽이고 뼈와 살을 거두어 그릇에 담아 홍법산(弘法山) 서쪽에 안장(安葬)한 다음, 여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侍墓)하였다. 시묘중인 어느날 잠깐 잠이 들었을 때, 아버지가 나타나 이런 시(詩)를 읊고는 사라졌다.

가시덤불 헤치고 효자여막 당도하니
넘치는 정에 느꺼운 눈물 한없이 흐르네.
날마다 흙 져다가 무덤 위에 덮나니
알아줄 이 밝은 달 맑은 바람뿐이로세.
살아 생전 봉양하고 죽고 나선 지켜주니
효도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뉘 말했노.

상기가 끝나자 묻어두었던 범의 고기를 가져다가 먹었다.
뒤에 과거에 급제하여 의종 때 기거사인(起居舍人)에 승진하였다. 1153년(의종 7)에는 기거사인으로 사신이 되어 금나라에 가서 용흥절(龍興節)을 축하하였다. 1155년 평장사(平章事) 최자영(崔子英),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양원준(梁元俊), 좌사간(左司諫) 박득령(朴得齡) 등과 함께 왕의 국정(國政) 자문에 응하였다.

1158년에는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서 국자좨주(國子祭酒) 염직량(廉直諒)과 함께 승보시(升補試, 生員試)를 맡아, 윤돈서(尹敦敍) 등 16명을 급제시켰으며, 뒤에 한림학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효숙공(孝肅公)이다.

최루백은 서원 염씨 염덕방(廉德方)의 딸 염경애(廉瓊愛, 1100년~1146년 3월 12일)와 혼인하여 4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최돈인(崔敦仁)은 예빈주부, 2남 최돈의(崔敦義)는 공역령(供驛令), 3남 최돈례(崔敦禮)는 과거에 급제한 후 낭중(郎中)을 역임했고, 4남 최돈지(崔敦智)는 승려가 되었다. 염경애의 친정어머니는 의령군대부인 심씨(宜寧郡大夫人 沈志義, 1083 - 1162)이다. 염경애가 죽은 후 유씨(柳氏)와 결혼하여 3남 2녀를 낳았다.

그의 호랑이 사살과 부친 시신 수습은 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 고려사 열전,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에도 소개되었다. 한참 후대인 1432년(조선 세종 14년)에 와서 특별히 증 자헌대부 예조판서(資憲大夫 禮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조선 숙종 때 효자비 정려가 세워졌다. 최루백의 정려비는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수기리에 있다가 후대에 봉담읍 분천리로 이전되었다. 1986년 5월 20일 화성시의 향토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다가, 2019년 10월 23일 향토문화재(유형) 제2호로 변경되었다. 최루백 효자각 정려는 화성시 봉담읍 분천리 165-1에 소재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