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문신, 시인. 광양김씨 시조. 자는 천민(天民).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郞), 한림학사(翰林學士) 등을 지냈다. 학문에 힘써 고시(古詩)로 이름을 떨쳐 해동 제일이라는 일컬음을 받았다고 하며, 청직하여 권세에 아부하지 않았다. 한림원에 있을 때 요나라의 사신을 시로써 맞아 존경을 받았고, 그 문명 때문에 재상 이자위(李子威)의 시기를 받아 한때 파직당하였다. 후에 선종에게 이름이 알려져 좌습유(左拾遺), 지제고(知制誥)에 기용되고, 이어 경산부(京山府: 지금의 星州)를 다스려 치적을 쌓았으며, 예종 때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요나라에 가는 길에 대기근이 있는 북부지방에서 주군(州郡)의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했다. 귀국 후 예부시랑, 국자좨주(國子祭酒), 한림학사,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를 역임하고 나서 치사(致仕)하였다. 평양 부벽루에 올랐다가 그곳에 걸린 평양의 산천을 읊은 시구들이 한결같이 신통하지 못하다고 모두 태워버리고, 스스로 지어 걸기로 하여 해가 질 무렵에야 겨우 한 구 '긴 성벽 한편으로는 넘쳐넘쳐 흐르는 물이요, 넓은 들 동쪽에는 한점한점 산이로다(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 '를 얻고는 끝내 그 짝을 채우지 못하여 통곡을 하며 내려왔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는 영달을 하려고 남의 말이나 본뜨며, 행세차로 짓는 시는 구역질이 난다고 크게 반발할 정도로, 문학이 영달을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는 임금이 책을 보다가 의심나는 것이 있어 물으면 대답할 정도로 신임을 받고 있었으나, 청직한 성격 때문에 평탄한 삶을 영위하지는 못하였다. 그의 작품이 온전하게 전하는 것은 거의 없어 부분적으로 그의 시세계를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