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문관. 충숙왕 대에 과거에 급제한 뒤 대관(臺官)이 되었다. 당시 권세 있는 자에게 뇌물을 주고 염치 없이 벼슬하는 자들이 많았는데, 이들의 고신에 서명하지 않아 미움을 사서 파직되었다. 1347년(충목왕 3) 정치관(整治官)으로 백문보(白文寶) 등과 함께 기황후(奇皇后)의 족제(族弟)인 기삼만(奇三萬)의 죄를 다스리다가 그가 죽은 것이 문제되어 원 으로부터 파견된 승가노(僧家奴)에 의하여 곤장을 맞았다. 1352년(공민왕 1) 나주목사에 제수되었지만 어머니가 연로하다 하여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355년 좌대언이 된 뒤 공민왕이 승직(僧職)을 제수하고자 불렀으나 나가지 않다가 어사대부에 제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