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후기의 문신. 호는 죽계(竹溪). 진천군(鎭川郡) 덕산면(德山面) 두촌리(斗村里)에서 태어났다. 그의 7대조는 1126년(인종 4)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피살되어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추증된 상산백(常山伯) 송인(宋仁)이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천성이 강직하고 학행이 탁월하여 왕의 총애를 받았다. 공민왕이 주연(酒宴)을 베푸는 자리에서 보좌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도 송인과 견줄만한 인물임을 칭찬하고는 교분을 두텁게 쌓았다. 1392년(공양왕 4)에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제수되었으나, 같은 해 4월에 포은이 살해당하고 정도전(鄭道傳)의 참언(讒言)을 받아 안성군사(安城軍事)로 부임하였다. 같은 해 7월에 조선이 건국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3일간 두문불출하고 통곡하더니 끝내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숨어 살면서 독서하며 지냈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그의 재능을 아끼어 소명(召命)하였으나 거절하였다. 그의 묘는 진천군 덕산면 두촌리에 있으며 부인과 합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