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후기의 문신. 충주석씨(忠州石氏)의 시조이다. 아들 천보(天補), 천경(天卿)과 함께 충렬왕의 총애를 받게 되자 교만과 횡포가 지나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1303년(충렬왕 29) 김세(金世)가 원나라 중서성에 석주일당이 충렬왕을 받들어 섬으로 도망하기 위하여 배를 만들며 양식을 비축한다고 고소함으로써 원나라에서 파견된 단사관(斷事官) 티무르부카(帖木兒不花)에 의하여 아들들과 함께 연경(燕京)으로 압송되었다. 이곳에서 김세와 대질한 결과 죄가 인정되어 가산은 적몰되고, 아들들과 함께 장류(杖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