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권단(權㫜)
  • 안동권씨(安東權氏),  출생~사망 : 1228 ~ 1311
고려 후기의 문신. 시호는 문청(文淸), 자는 회지(晦之). 호는 몽암(夢巖), 스스로 몽암거사(夢巖居士) 라 하였다.

아버지는 한림학사 권위(權韙)이다. 일찍이 숨어 살 뜻을 가졌으나, 아버지의 강권에 의하여 문하록사(門下錄事)로 나갔다가 재상 유경(柳璥)의 권유로 과거에 나아가 급제하였다. 합문지후(閤門祗侯)를 거쳐 예산(禮山), 승주(昇州), 맹산(孟山), 개천(价川) 등 네 고을의 부사를 역임한 이래 중외에 기용되었다. 뒤에 동경(東京)을 유수(留守) 하면서 중앙에 바치는 능라(綾羅)를 지나치게 거두어 저장하였던 갑방(甲坊)을 철폐하여 지방민의 부담을 경감하였고, 백성의 조세를 훔치는 사호(司戶)가 있자 아문에서 격살하여, 다른 사람들이 다시는 범법하지 못하게 하였다.

3도의 안찰사를 역임했는데, 경상도안찰사 때에는 진주부사 백현석(白玄錫)과 보주부사(甫州副使) 장전(張悛)의 부정을 탄핵하였다. 국자좨주(國子祭酒),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로 옮겼을 때에, 진주지방관 최참(崔○)이 바친 능라가 조잡하여 왕이 읍리(邑吏)를 고문하게 하였더니, '권단이 안렴사가 되어 실값을 감한 까닭'이라 대답하여 최참과 함께 파직되었으나, 백성의 폐단을 제거했다는 공으로 복직되었다.

1279년(충렬왕 5)에는 충청도도지휘사(忠淸道都指揮使)가 되어 전란중의 산적한 문제를 처리하였고, 당시 미결중이던 농민의 송사를 맡은 7인 중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1284년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로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김주정(金周鼎)과 함께 과거를 주관하여, 권한공(權漢功), 김원상(金元祥), 최성지(崔誠之), 채홍철(蔡洪哲), 백이정(白○正) 등 명사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성품이 남에게 영합하지 않아 3품에 제수된지 10년이 넘어서야 승지에 제수되고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올랐다. 그러나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여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로서 치사(致仕)하고, 뒤에 다시 찬성사(贊成事)로 치사하였다. 그는 성품이 청렴, 겸손하고 불교를 독신하여 만년에는 선흥사(禪興寺)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일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