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중기의 문신. 초명은 굉(肱). 삼한공신 희순(希順)의 8대손이다. 의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경산부사(京山府使)가 되어 청백하였으며, 임기가 만료되어 집에 돌아와서도 가난하게 지내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이때 재상 이지무(李之茂)의 장수를 비는 소문(疏文)을 작성하였는데, 문장력을 인정받아 국학학유(國學學諭)에 임명되었다가 동문원녹사(同文院錄事)에 이르렀다. 1170년 명종이 즉위한 뒤 금나라에서 순문사(詢問使)가 자주 왔을 때 지은 사명(詞命)이 왕의 뜻에 맞아 감문위녹사(監門衛錄事)가 되었다. 이후 좌정언(左正言), 기거주(起居注), 중서사인(中書舍人)을 지내고, 간의(諫議), 이부시랑(吏部侍郞)을 거쳐 사재경(司宰卿)으로 간의를 겸직하였다. 그는 성품이 순후하고 남의 착한 것을 드러내기를 좋아하여 임금이 항상 직신(直臣)이라 불렀다. 그러나 간성(諫省)에 있은 지 9년 동안 한번도 건백함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