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품이 청렴하고 근신하여 서리(胥吏)에서 시작해 내시(內侍)에 임명되고, 1142년(인종 20) 사신으로 금나라 동경(東京)에 다녀왔다. 1148년 우상시(右常侍) 최함(崔諴), 중서사인(中書舍人) 최윤의(崔允儀) 등의 탄핵을 받아, 김참(金ㅍ) 등 7명의 환자(宦者)와 함께 축출되었다가 다시 복직되어 이부상서(吏部尙書)가 되었다.
1162년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오르고 다시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제수되었으나, 이듬해 권신(權臣)인 최유칭(崔褎偁)과 틈이 생겨 화가 나서 죽었다. 용의(容儀)가 아름답고 응대(應對)에 능했으며, 항상 각문(閣門)을 겸해 빈객을 접대하는 데 진퇴가 바르므로 드디어 재상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성품이 청렴하고 근신하여 서리(胥吏)에서 시작해 내시(內侍)에 임명되고, 1142년(인종 20) 사신으로 금나라 동경(東京)에 다녀왔다. 1148년 우상시(右常侍) 최함(崔諴), 중서사인(中書舍人) 최윤의(崔允儀) 등의 탄핵을 받아, 김참(金ㅍ) 등 7명의 환자(宦者)와 함께 축출되었다가 다시 복직되어 이부상서(吏部尙書)가 되었다.
1162년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오르고 다시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제수되었으나, 이듬해 권신(權臣)인 최유칭(崔褎偁)과 틈이 생겨 화가 나서 죽었다. 용의(容儀)가 아름답고 응대(應對)에 능했으며, 항상 각문(閣門)을 겸해 빈객을 접대하는 데 진퇴가 바르므로 드디어 재상에까지 오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