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8년(예종 3) 외고조부 삼한공신대상(三韓功臣大相) 김칠(金柒)의 문음(門蔭)에 의하여 서리(胥吏)가 되었으며, 그뒤 과거에 합격하여 용강현위연해감선사(龍岡縣尉沿海監船使)에 임명되었다. 1141년(인종 19) 시합문지후(試閤門祉候)로서 풍주방어사 겸 권농사에 임명되었다. 1144년 임기가 만료되고 나이 70세가 되어서 모든 관직에서 해임되어 개경에 돌아왔다. 2년 뒤 봉선고부사(奉先庫副使)에 기용되었다. 인물됨이 총명, 정직하였고, 염치가 있었다. 마음을 담박하게 가져 물아(物我)를 잊었으며, 불학(佛學)에 정진하여 완연히 세속사람의 테를 벗어났다고 한다.
1108년(예종 3) 외고조부 삼한공신대상(三韓功臣大相) 김칠(金柒)의 문음(門蔭)에 의하여 서리(胥吏)가 되었으며, 그뒤 과거에 합격하여 용강현위연해감선사(龍岡縣尉沿海監船使)에 임명되었다. 1141년(인종 19) 시합문지후(試閤門祉候)로서 풍주방어사 겸 권농사에 임명되었다. 1144년 임기가 만료되고 나이 70세가 되어서 모든 관직에서 해임되어 개경에 돌아왔다. 2년 뒤 봉선고부사(奉先庫副使)에 기용되었다. 인물됨이 총명, 정직하였고, 염치가 있었다. 마음을 담박하게 가져 물아(物我)를 잊었으며, 불학(佛學)에 정진하여 완연히 세속사람의 테를 벗어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