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김영부(金永夫)
  • 영광김씨(靈光金氏),  출생~사망 : 1096 ~ 1172
고려 중기의 문신. 초명은 동부(東夫)이며, 시호는 영간(英簡)이다. 상서좌복야 김극검(金克儉)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원외랑 김태개(金台凱)의 딸이다.

1125년(인종 3) 과거에 급제하고,李資謙)의 난에 분개하여 이에 대항하다 반도들에게 잡혀 죽을 뻔하였으나, 반도(叛徒)들이 그의 의기(義氣)에 감동하여 풀어주었다. 1130년 교주도방어판관(交州道防禦判官)이 되었고, 1142년 우정언지제고(右正言知制誥)를 거쳐 지승천부사(知承天府事使)로 부임하여 백성들이 소를 잡아 사당에 제사를 지내는 것을 금하고, 농사를 진작(振作)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146년(의종 1) 왕이 지나치게 격구와 말 타기를 좋아한다고 논박하다가, 안남도호부사로 좌천되었다.

1148년(의종 2) 이식(李軾)과 함께 사신으로 금나라에 가서 책봉을 사례하였다. 1151년에 간관(諫官)으로 있으면서 재상 최유청(崔惟淸), 문공원(文公元) 등과 함께 의종의 아우인 대녕후 경(大寧侯暻)과 태후(太后)의 매서(妹壻)인 내시낭중(內侍郞中) 정서(鄭敍)가 서로 결탁하여 연락유희(宴樂遊戱)한다고 탄핵하였다. 대령후 왕경은 인종의 둘째아들로서 도량이 있어 중심(衆心)을 얻었으므로 당시 일부에서는 왕으로 추대될 것이라는 의심을 받기도 했었다. 환자(宦者) 정함(鄭諴)과 간신(諫臣) 김존중(金存中)은 대령후와 친한 정서와 사이가 좋지 못하였으므로 대령후와 정서를 모함했던 것인데, 재상 최유청, 간관 김영부 등이이 모함을 그대로 탄핵하여 결국 정서는 동래로 귀양가고 대령후는 파하게 되었다.

1157년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태자빈객(太子賓客)이 되었다. 1160년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동지공거(同知貢擧) 이지심(李知深)과 함께 최효저(崔孝著) 등 진사 33인과 명경(明經) 3인을 뽑았다. 이듬해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가 되었으며 다시 이듬해 참지정사(參知政事) 판상서병부사(判尙書兵部事), 1164년 중서시랑(中書侍郞),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