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문달한(文達漢)
  • 남평문씨(南平文氏),  출생~사망 : ? ~ 1392
고려 말기의 문신. 찬성사 경(璟)의 아들이다. 우왕 때 대호군(大護軍)이 되고,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때 추성익조공신(推誠翊祚功臣)이 되었으며,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를 거쳐 1388년(우왕 14) 문하평리(門下評理)로서 양광경상도도체찰사(楊廣慶尙道都體察使)로 나갔다. 이때 왜구 1천여명이 옥주(沃州), 보령(保寧) 등지를 함락, 개태사(開泰寺)에 침입하는 등 계룡산일대를 노략질하자 왕안덕(王安德), 도흥(都興), 김사혁(金斯革), 박수년(朴壽年) 등과 함께 이를 공격하여 공주 반룡사(盤龍寺)에서 대파하였다. 뒤에 우왕이 원중포(元中浦)에 갈 때 한 물가에 이르러, 말을 탄 채 뛰어 건너려는 것을 만류하였다가 비위를 거슬려 삭직되었다. 오랫동안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다가 최영(崔瑩) 등의 노력으로 복직, 다시 문하평리가 되어 추충익대보조공신(推忠翊戴輔祚功臣)의 호를 받고 찬성사에 올랐다. 그뒤 탐학이 심하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합포(合浦), 철원 등지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 삼사우사(三司右使)가 되었다. 공양왕의 즉위초 이림(李琳)의 일파로 탄핵을 받고 다시 유배되었다. 그뒤 풀려나 1392년 순평군(順平君)에 봉하여졌다. 김제의 저산서원(楮山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