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박형(朴形)
  • 죽산박씨(竹山朴氏),  출생~사망 : ? ~ 1398
고려 말기의 문신.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지낸 덕용(德龍)의 아들이다. 일찍이 성균시(成均試)를 거쳐 1347년(충목왕 3) 문과에 급제한 뒤 대간(臺諫)과 대언(代言)을 역임하였다. 우왕이 즉위하자 고려는 명나라 와의 친교를 단절하고 원나라 와의 친교를 재개하였는데 이인임(李仁任)은 이에 반대하는 이숭인(李崇仁), 정몽주(鄭夢周), 박형 등이 자기를 해(害)하려 했다는 구실로 모두 귀양보냈다. 1379년(우왕 5) 밀직사(密直使)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를 겸임하였고, 1382년에는 왕이 절급도감(折給都監)을 설치하자 판개성(判開城)으로 별좌(別坐)가 되어 토지를 분급(分給)하였다. 1388년 최영(崔瑩) 등이 조반(趙○)의 옥사(獄事)를 기화로 이인임, 임견미(林堅味), 염흥방(廉興邦) 등을 축출할 때 임견미의 족당(族黨)으로 그의 아들 밀직제학(密直提學) 박중용(朴仲容)이 연루되어 처형당하자, 그는 각산수(角山戍)로 유배되었다. 조선 초에 예문춘추관대학사가 되고 이어 찬성사(贊成事)로 치사하였다. 시호는 정강(靖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