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안종원(安宗源)
  • 순흥안씨(順興安氏),  출생~사망 : 1325 ~ 1394
고려 말기의 문신. 자는 사청(嗣淸). 호는 쌍청당(雙淸堂). 아버지는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축(軸)이다. 17세 때 과거에 급제, 충목왕 때 사한(史翰)으로 선보(選輔)되었다. 임기가 차서 승진, 전보될 즈음에 동료 심동로(沈東老)가 나이는 많고 직위가 낮았으므로 그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였다. 안축 은이 소식을 듣고 가문에 인물이 났다고 크게 기뻐하였다. 1년 뒤에 삼사도사에 임명되었고, 공민왕 초에 전법정랑이 되었다. 이때 많은 소송사건을 법에 따라 공정하고 신속하게 처리하여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시어사(侍御史)를 거쳐 양광도안렴사로 있을 때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내려온 공민왕을 충주에서 맞았다. 왕이 다시 음죽(陰竹)으로 옮기니 관리와 백성이 다 도망하여 왕이 접대를 받을 수 없게 되자, 그 책임을 물어 지청풍군사(知淸風郡事)로 좌천되었다가 뒤에 전법총랑(典法摠郞)에 승진되었다. 그무렵 신돈(辛旽)에게 아부하는 사대부가 많았는데, 그는 이를 거부하였다. 이로 인해서 참소를 당하여 강릉부사로 좌천되었는데 그곳에서의 선정으로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제사지냈다. 한거하여 있기를 7∼8년, 신돈이 주살된 뒤 사헌시사(司憲侍史)를 거쳐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에 이르렀다. 우왕 초에 좌사의대부 유순(柳珣) 외에 다섯 사람과 더불어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환관의 폐단을 논하였으나, 재상들에 의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성균관대사성, 우상시(右常侍)를 거쳐 대사헌에 승진하였다가 판숭경부사(判崇敬府事)가 된 뒤, 흥녕군(興寧君)에 피봉되었다. 이무렵 공민왕 때부터 환관으로 있던 김현(金玄)이 내사(內事)를 잘 정돈하지 못한다고 논박하여, 김현은 회덕현에 유배되었으며, 또한 환관의 수를 10명내로 줄여서 그들에 의하여 국정이 문란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그리고 명나라에 가는 사신들이 사행(使行)을 기화로 금, 은, 말 또는 포목들을 밀반출하여 장사를 하는 것을 엄금하도록 건의하였다. 1382년(우왕 8) 순흥군(順興君)으로 개봉(改封)되고 다시 공신호를 받았으며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다. 최영(崔瑩)이 탐관과 권신들을 숙청할 즈음에, 그를 청렴근직하다고 하여 문하찬성사로 기용, 관리의 인사권을 맡겼으나 곧 사임하였다. 그뒤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이 되고, 조선 조에 와서는 판문하부사가 되었으나 곧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