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호는 노포(蘆浦). 아버지는 중랑장 손주(孫○)이다.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여 우왕 때 남양부사,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를 거쳐 1385년(우왕 11) 전라, 충청, 경상삼도체찰사가 되었다.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기의 정치상황은 최영(崔瑩)과 이색(李穡)의 집정세력을 차례로 제거한 이성계계(李成桂系), 정몽주계(鄭夢周系), 조준계(趙浚系)의 협력정권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성계의 즉위에 앞서 정몽주계열의 숙청이 있었다. 이에 1392년(공양왕 4) 정몽주가 살해되자, 그 일당으로 몰려 우현보(禹玄寶), 김진양(金震陽) 등과 함께 의령으로 유배되었다. 같은해 조선이 개국되자, 그의 충절을 가상히 여긴 태조에 의하여 배소를 예천으로 옮기게 되었고, 그곳에서 죽었다. 용궁(龍宮)의 기천서원(箕川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