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초명은 윤(胤). 호는 송산(松山). 아버지는 판도판서(版圖判書) 덕유(德裕)이며, 어머니는 오의(吳懿)의 딸이다. 영의정부사 준(浚)의 동생이다. 유년에 출가하여 여러 절의 주지를 역임하다가 30세가 넘어 환속하고, 승직(僧職)경력으로 인하여 좌윤(左尹)에 서용되었으며, 고려 말에는 안렴사(按廉使)를 지냈다. 1392년(태조 1) 상장군으로 이성계(李成桂) 추대에 참여하고 개국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1394년 경상도도절제사, 1397년 지중추원사, 1400년(정종 2) 삼사우복야(三司右僕射)를 거쳐 1402년(태종 2) 도총제(都摠制) 재직중에 사은사의 명을 받았으나, 사행이 위험하다는 소문을 듣고 병을 칭하여 이를 사퇴하였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직첩을 몰수당한 뒤 축산도(丑山島)에 유배되었다가 곧 사면되었다. 1403년 좌군도총제가 되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하여졌으며, 이해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7년 충청도도절제사 겸 수군도절제사를 거쳐, 이듬해 고의로 딸의 입명(入明)를 저지한 일로 개령에 부처되었다. 곧 사면되어 청성군에 봉하여지고, 1410년 봉안사(奉安使)가 되어 태조 진영(眞影)을 완산부(完山府)에 봉안하였다. 1419년(세종 1)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에 보임되고, 1421년 3월 71세로 퇴관하여야 하였지만 궤장(○杖)을 받고 계속 벼슬길에 있다가 같은해 12월 평성부원군에 진봉하였다. 그런데 그의 생애에 있어서 ' 조선이 개국되고 형 준으로 인하여 개국공신에 책록, 준의 간곡한 출사권유가 있었지만 고려에 절의를 지켜 은거하였으며, 자손에게도 고려 에의 절의를 당부하였다.'고 한 이설이 있기도 하나 신빙하기 어렵다. 양주의 정절사(旌節祠)와 송산사(松山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평간(平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