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검교첨의평리(檢校僉議評理)를 지낸 선지(善之)의 손자이며,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송수(松壽)의 아들이다. 처음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을 지내다가, 1389년(창왕 1) 김저(金佇)의 옥사에 연루되어 다음해 광주(光州)로 유배되었다. 1391년(공양왕 3) 국대비의 생일을 맞아 하륜(河崙), 우인열(禹仁烈) 등과 함께 특사로 풀려 나온 뒤 장단의 대덕산(大德山)에 은거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뒤 태조가 그의 덕망을 아껴 여러 차례 불렀으나 응하지 않다가, 1413년(태종 13) 정월에 검교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를 제수받았으며, 다음해 검교한성부사(檢校漢城府事)를 거쳐 1435년(세종 17) 판중추원사가 된 뒤 이듬해 한창수(韓昌壽), 오승(吳陞)과 함께 궤장(○杖)을 하사받았다. 시호는 희정(僖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