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총명하고 매우 민첩하였으므로 연주분도장군(延州分道將軍) 김치규(金稚圭)가 이를 기이하게 여겨 서울에 데리고 올라와 공부를 시켰으나 여러번 과거에 실패한 뒤 병으로 고향에 돌아갔다. 1174년(명종 4)에 서경(西京)에서 조위총(趙位寵)의 난이 일어나 절령(○嶺: 慈悲嶺) 이북 40여 성이 다 이에 응하였으나 연주도령(延州都領) 인 아버지와 함께 연주성(延州城)을 굳게 지킴으로써 주민들의 추대를 받아 권행병마대사(權行兵馬臺事)가 되었으며, 조위총이 회유하기 위하여 보낸 사절을 잡아죽였다. 그뒤 주민들의 추대로 권감창사사(權監倉使事)가 되었는데 이때 서경의 군대 1만여 명이 연주성을 포위하자 이를 쳐서 궤멸시켰고, 다시 서울에 진격하였다가 패퇴한 서경의 군대가 여러 겹으로 포위하여왔으나 이를 쳐서 패퇴시키고 많은 포로와 무기를 노획하였다. 이듬해 금(金)의 세종(世宗)이 연주성이 고군분투한다는 소식을 듣고 원군을 보내왔으나 이를 사양하여 돌려보냈고, 다시 서경의 군대가 연주성을 공격하자 또한 이를 쳐서 물리쳤다. 그 공으로 내시지후(內侍祗候)가 되었고 아버지는 장군이 되었다. 뒤이어 안남도호부부사(安南都護府副使)가 되어 정사를 청렴하고 밝게 함으로써 관리와 백성들의 공경을 받았으며, 특히 음사(淫祠)를 싫어하여 이를 엄히 금하니 무당이 경계에 들어오지 못하였다. 뒤에 도관낭중(都官郞中)이 되었다가 이부낭중(吏部郞中)에 옮겼으나 간관의 반대로 병부낭중이 되었으며, 뒤이어 사재소경(司宰少卿)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처모상(妻母喪)으로 문제가 생겨 파면되었다. 신종 때 다시 기용되어 전중소감(殿中少監)이 되었으며 병부상서에 이르러 치사(致仕)하였다.
어려서 총명하고 매우 민첩하였으므로 연주분도장군(延州分道將軍) 김치규(金稚圭)가 이를 기이하게 여겨 서울에 데리고 올라와 공부를 시켰으나 여러번 과거에 실패한 뒤 병으로 고향에 돌아갔다. 1174년(명종 4)에 서경(西京)에서 조위총(趙位寵)의 난이 일어나 절령(○嶺: 慈悲嶺) 이북 40여 성이 다 이에 응하였으나 연주도령(延州都領) 인 아버지와 함께 연주성(延州城)을 굳게 지킴으로써 주민들의 추대를 받아 권행병마대사(權行兵馬臺事)가 되었으며, 조위총이 회유하기 위하여 보낸 사절을 잡아죽였다. 그뒤 주민들의 추대로 권감창사사(權監倉使事)가 되었는데 이때 서경의 군대 1만여 명이 연주성을 포위하자 이를 쳐서 궤멸시켰고, 다시 서울에 진격하였다가 패퇴한 서경의 군대가 여러 겹으로 포위하여왔으나 이를 쳐서 패퇴시키고 많은 포로와 무기를 노획하였다. 이듬해 금(金)의 세종(世宗)이 연주성이 고군분투한다는 소식을 듣고 원군을 보내왔으나 이를 사양하여 돌려보냈고, 다시 서경의 군대가 연주성을 공격하자 또한 이를 쳐서 물리쳤다. 그 공으로 내시지후(內侍祗候)가 되었고 아버지는 장군이 되었다. 뒤이어 안남도호부부사(安南都護府副使)가 되어 정사를 청렴하고 밝게 함으로써 관리와 백성들의 공경을 받았으며, 특히 음사(淫祠)를 싫어하여 이를 엄히 금하니 무당이 경계에 들어오지 못하였다. 뒤에 도관낭중(都官郞中)이 되었다가 이부낭중(吏部郞中)에 옮겼으나 간관의 반대로 병부낭중이 되었으며, 뒤이어 사재소경(司宰少卿)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처모상(妻母喪)으로 문제가 생겨 파면되었다. 신종 때 다시 기용되어 전중소감(殿中少監)이 되었으며 병부상서에 이르러 치사(致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