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무신이며 재상(宰相). 전주 만경현(萬頃縣) 사람으로 두릉두씨(杜陵杜氏)의 시조이다. 학식은 없었으나 성품이 순후하고 가식이 적으며 용기와 힘이 세었다. 의종 때 공학군(控鶴軍)에 뽑혔다가 대정(隊正)이 되어 후덕전(厚德殿)의 견룡(牽龍)이 되었다.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무인들이 남의 재물을 약탈하였으나 홀로 전문(殿門)을 지키면서 남의 재산을 범하지 않았다. 명종 초 산원(散員)이 되었다가 이의방(李義方)의 추천으로 내순검군지유(內巡檢軍指諭)가 되었으며 뒤이어 낭장(郞將)이 되었다. 1173년(명종 3) 김보당(金甫當)이 반란을 일으키자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가 되어 인심을 수습하고 뒤이어 장군이 되었으며, 서북면병마부사가 되어 창주(昌州: 지금의 평안북도 창성)를 진수하였다. 이때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반란을 일으키자 개성으로 후퇴하였다가 다시 동로가발병마부사(東路加發兵馬副使)가 되어 고산(孤山), 선주(宣州: 지금의 선천), 맹주(孟州: 지금의 맹산), 무주(撫州: 지금의 덕천군) 등지에서 무공을 세운 후 개성으로 개선하였으며 다시 후군총관사(後軍摠管使)가 되어 연주(漣州: 지금의 개천)에서 적을 크게 무찔렀다. 1176년에 윤인첨(尹鱗瞻)과 함께 서경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조위총을 사로잡아 죽였는데, 그뒤 서북면병마사가 되어 영청(永淸: 지금의 평원)을 진수했다. 이듬해 북로처치사(北路處置使)를 겸하였고, 뒤이어 상장군,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에 올랐다. 1180년에 공부상서, 이듬해 호부상서, 1185년에 참지정사(參知政事), 1190년에 수태위(守太尉)가 되었고, 이듬해 판이부사(判吏部事), 수국사(修國史)가 되어 전주(銓注)를 맡았다. 뒤이어 평장사(平章事)가 되었다가 1193년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이 되었으며, 다시 감수국사(監修國史)를 겸하였다. 이듬해 이의민(李義旼)과 함께 문하시중이 되었다가 1196년에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이듬해 새로 정권을 잡은 최충헌(崔忠獻)에 의하여 자연도(紫燕島)로 귀양갔다가 울분에 피를 토하고 죽었는데 그가 금을 가지고 있어 그의 종이 도둑질하려고 은밀히 죽였다고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