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무신. 영후(永侯)의 아들이다. 예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경원군판관(慶源郡判官)이 되었다. 인종 때 좌정언(左正言)이 되어 1132년(인종 10) 합문(閤門)에 엎드려 상소하여 3일 동안이나 시사(時事)를 말하는 등 왕의 뜻에 거슬려 인주(仁州: 지금의 仁川)의 지사로 좌천되었다. 당시 공과(功課)가 최상이 되므로 발탁되어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되었으며, 그뒤 20여년 동안 대간(臺諫)으로 있으면서 조정의 일을 바로잡는 데 힘썼다. 1138년에 잡단(雜端)으로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최관(崔灌), 시어사 인의(印儀) 등과 함께 추밀사(樞密使) 진숙(陳淑)이 묘청(妙淸)의 난으로 서경을 칠 때, 남의 노비와 보대(寶帶)를 뇌물로 받은 것을 탄핵하여 파직하게 하였다. 뒤에 우부승선(右副承宣)이 되었고, 추밀원부사 겸 태자빈객(太子賓客)이 되었다. 진퇴가 단아하고 응대(應對)가 명빈하였다. 시호는 충질(忠質)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