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1년(원종 12) 장군으로 몽고에 가서 고려군이 진도(珍島)에 있던 삼별초를 칠 때 몽고 장군 아해(阿海)가 후원하지 않은 사실을 고하여 그를 소환하게 하였으며, 이해에 다시 보성천호(寶城千戶) 등과 함께 몽고에 가서 둔전(屯田)의 폐지와 왕의 친조(親朝)를 주청하고 돌아왔다. 또한, 이해 8월에는 삼별초의 위협으로 진도에 간 사람들을 본거지에 돌려보내라는 몽제(蒙帝)의 명을 따르지 않는 몽고원수 흔도(忻都)를 고발하러 몽고에 다녀오는 등 한해에 세 차례나 다녀왔다.
원종에게 원나라 풍속을 따라 복색을 고치도록 권하기도 하였다. 1275년(충렬왕 1) 대장군으로 시중 김방경(金方慶)과 함께 원나라에 가서 전함, 병량(兵糧)을 마련하는 데 대한 애로를 진정하고, 일본 정벌의 중지를 요청하였다. 뒤에 필도치(必闍赤: 정방의 서기직)가 되어 기무(機務)에 참여하였다.
1271년(원종 12) 장군으로 몽고에 가서 고려군이 진도(珍島)에 있던 삼별초를 칠 때 몽고 장군 아해(阿海)가 후원하지 않은 사실을 고하여 그를 소환하게 하였으며, 이해에 다시 보성천호(寶城千戶) 등과 함께 몽고에 가서 둔전(屯田)의 폐지와 왕의 친조(親朝)를 주청하고 돌아왔다. 또한, 이해 8월에는 삼별초의 위협으로 진도에 간 사람들을 본거지에 돌려보내라는 몽제(蒙帝)의 명을 따르지 않는 몽고원수 흔도(忻都)를 고발하러 몽고에 다녀오는 등 한해에 세 차례나 다녀왔다.
원종에게 원나라 풍속을 따라 복색을 고치도록 권하기도 하였다. 1275년(충렬왕 1) 대장군으로 시중 김방경(金方慶)과 함께 원나라에 가서 전함, 병량(兵糧)을 마련하는 데 대한 애로를 진정하고, 일본 정벌의 중지를 요청하였다. 뒤에 필도치(必闍赤: 정방의 서기직)가 되어 기무(機務)에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