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이의방(李義方)
  • 전주이씨(全州李氏),  출생~사망 : ? ~ 1174
고려 무신정권기의 집권무신. 의종 말에 산원으로 견룡행수(牽龍行首)가 되었다. 1170년(의종 24) 보현원(普賢院)에서 대장군 정중부(鄭仲夫), 이고(李高) 등과 더불어 무신란을 일으켜 성공한 뒤 응양용호군(鷹揚龍虎軍)의 중랑장에 임명되고 형 준의(俊儀)는 승선에 임명되었다. 정중부 등과 더불어 의종을 폐위하고 명종을 맞아 무신정권을 수립한 뒤 대장군 전중감 겸 집주(大將軍殿中監兼執奏)에 임명되고, 벽상공신(壁上功臣)이 되어 그 형상이 각상(閣上)에 그려졌다. 1171년(명종 1) 대장군 한순(韓順), 장군 한공(韓恭), 신대예(申大譽), 사직재(史直哉), 차중규(車仲規) 등이 비방하자, 평소 친분이 있던 차중규는 귀양을 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죽였다. 또한, 일당인 이고가 악소(惡少: 무뢰배), 법운사(法雲寺)의 중 수혜(修惠), 개국사(開國寺)의 중 현소(玄素) 등과 결탁하여 분수에 넘치는 뜻을 나타내므로 그를 미워하게 되었다. 또 태자(太子)에게 원복(元服: 冠服)을 가하는 잔치가 여정궁(麗正宮)에서 베풀어지자 선화사(宣花使)로 참여하여 난을 일으키려 한 이고를 죽이고 순검군을 풀어 그의 어머니와 여당을 잡아죽였으나, 그 아버지는 일찍이 자식인 고가 불초함을 미워하여 자식으로 삼지 않았으므로 귀양 보내는 데 그쳤다. 1173년에 왕녀를 봉하여 궁주(宮主)를 삼는데, 기생들을 데리고 중방(重房)에서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술을 마시고 떠들며 북치는 소리가 대궐에까지 들려도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나 벼슬은 위위경 흥위위섭대장군 지병부사(衛尉卿興威衛攝大將軍知兵部事)에 올랐다. 1174년에 귀법사(歸法寺)의 중 100여명이 성의 북문을 침범하여 승록(僧錄) 선유(宣諭)을 죽이므로 병사를 거느리고 이들을 물리쳤다. 또, 중광(重光), 홍호(弘護), 귀법, 홍화(弘化) 등 여러 절의 중 2, 000여명이 성의 숭인문(崇仁門)을 불사르고 자신과 형을 죽이려 하므로, 부병(府兵)을 모아 중 100여명을 죽이고, 나아가 중광, 홍호, 귀법, 용흥(龍興), 묘지(妙智), 복흥(福興) 등 여러 절을 허물고 불사르며 많은 재물을 빼앗았다. 이에 형 준의가 그를 꾸짖어 '너에게 삼대악(三大惡)이 있으니, 그 하나는 임금을 쫓아내어 죽이고 그 저택과 희첩(姬妾)을 취함이요, 그 둘은 태후의 여동생을 위협하여 간통함이요, 그 셋은 국정을 마음대로 함이다. '라고 하자, 크게 노하여 형을 죽이려 하였으나 문극겸(文克謙)이 만류해 그 말을 따랐다. 이때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무신정권에 반발하여 군대를 일으켜 개성 근교까지 와서 진을 치자, 크게 노하여 서경인인 상서(尙書) 윤인미(尹仁美), 대장군 김덕신(金德臣), 장군 김석재(金錫才) 등 귀천 없이 모두 잡아죽여 저자에 효수하였다. 그리고 군대를 거느리고 나아가 개성 근교의 서경군대를 무찌르고 대동강까지 갔으나, 흩어졌던 서경군대가 다시 모여 성을 굳게 지키므로, 성밖에서 한달 정도 주둔하다가 모진 추위로 더 싸우지 못하고 패하여 돌아왔다. 좌승선에 임명되자 딸을 바쳐 태자비를 삼고 난 뒤 더욱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하여 조정을 어지럽게 하므로 모든 사람들이 분개하고 원망하였다. 결국, 정중부의 아들 균(筠)과 공모한 중 종참(宗○)에 의하여 살해당했고, 형 준의와 그 여당인 고득원(高得元), 유윤원(柳允元) 등도 죽임을 당하였다. 또한, 그의 딸도 적신(賊臣)의 자식이라 하여 태자비에서 폐출되었다. 한편, 그가 죽은 뒤인 1176년에는 그의 문객인 장군 이영령(李永齡)과 별장 고득시(高得時), 대정(隊正) 돈장(敦章) 등이 정중부를 죽여 이의방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으나 일이 누설되어 귀양가게 된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