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 자는 불비(不非). 금오위(金吾衛)상장군 단서(丹瑞)의 후손으로 곡산연씨의 실질적인 시조이다.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 때 우군도통수 이성계(李成桂)의 군진무(軍鎭撫)로 종군한 공로로 조선이 건국되자 개국원종공신에 책봉되었으며, 1393년(태조 2) 회군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1401년(태종 1) 제2차 왕자의 난 때 정안군파(定安君派)에 가담하였고, 정안군이 세제로 책봉되고 등극하는 과정에서 공로가 많은 사람을 포상하였는데, 이때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었다. 또한 이해에 태종은 갑사(甲士: 中央侍衛軍)와 의용자(毅勇者) 300인을 차출하여 친위대를 구성, 내갑사(內甲士)라 하였는데, 그는 이숙번(李叔蕃), 조연(趙涓), 한규(韓圭) 등과 더불어 내갑사의 통수권자가 되었다. 1402년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에 임명되고, 1407년 판한성부사 겸 우군총제가 되었으며, 뒤에 상장군, 호조전서 등을 역임하였다. 1410년 동북면병마도절제사로 야인의 침입을 방어하였으며, 이해에 길주도도안무찰리사가 되어 경원부(慶源府)와 경성(鏡城)에 입성, 수복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간룡성(干龍城) 싸움에서 패퇴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함주(咸州)로 유배당하였으나, 공신에 대한 예우로서 그의 고신(告身)은 삭탈당하지 아니하고 추방만 당하는 특혜를 누렸다. 1411년 각 위(衛)에 절제사를 설치하는 군제개혁이 있었는데, 이때 의흥시위사절제사에 보임되었다. 이해 12월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퇴임하였고, 이듬해에 기복하여 동북면도순문사가 되었는데 이때에 함주군 일대에 있는 4조왕(四祖王: 穆祖, 翼祖, 度祖, 桓祖)과 그의 비(妃)능의 경역을 확정하고 정비하는 일을 수행하였다. 1413년 영흥부윤(永興府尹)을 겸직하였으며, 위의 공로로 곡산군(谷山君)에 봉해졌다. 이듬해에 노모의 구환을 위하여 사직하려 하였으나 허가받지 못하다가 왕으로부터 시연(侍宴)을 받고 휴가를 받았다. 이와같은 그의 효행으로 말미암아 정려를 받았다. 모친상을 치르고, 1416년 등용되어 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가 되고, 이어 의정부참찬, 중군총제(中軍摠制)를 역임하였다. 1418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다오면서 의서(醫書)와 약재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1419년(세종 1) 훈신에 대한 예우로서 판중군도총제부사에 오르고, 1422년 곡산부원군(谷山府院君)에 훈봉되었고, 이어 수릉관(守陵官)이 되었다. 1426년 3월 김도련회뢰사건(金道練賄賂事件)에 연루되어 인제에 유배되었다가 공신의 은전을 입고 풀려나와 직첩을 돌려받고 곡산부원군에 재훈봉되었다. 그가 죽자 3일간 조례를 정파하고 예장(禮葬)하였다. 시호는 정후(靖厚)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