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황희석(黃希碩)
  • 평해황씨(平海黃氏),  출생~사망 : ? ~ 1394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 고려 때 시중 유중(裕中)의 후손으로, 판서 천록(天祿)의 아들이다. 본래 출가하였다가 우왕 때에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를 역임하였다. 1381년(우왕 7) 왜구가 명량향(鳴梁鄕)에 침입하는 등 전라도가 소란해지자 체찰사(體察使)로 파견되어 진무하였다. 뒤에 단주상만호(端州上萬戶)에 임명되었는데, 1383년 7월 요심(遼瀋)의 적이 단주에 침입하자 단주상만호 육려(陸麗), 청주천호(靑州千戶) 이두란(李豆蘭) 등과 연합하여 해양(海陽) 등지까지 추격하여 격퇴하였다. 1388년 요동원정군이 발진하게 되자 청주상만호로서 예하군사를 이끌고 우군도통사 이성계(李成桂)의 휘하에 들어갔다. 이성계가 회군을 단행하여 반정에 성공하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승진되었으며, 1389년(공양왕 1) 회군공신에 책봉되었다. 1392년 3월에는 이성계가 낙마하여 위기에 몰렸을 때 병사들을 이끌고 이성계를 보호하였다. 또한, 그해 정몽주(鄭夢周)가 격살당하자, 사태수습책으로 이성계의 명을 받아 정몽주 일파를 탄핵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어 구성로(具成老) 등과 더불어 제군사부(諸軍事府) 군관 200여명의 연서를 받아, 정몽주 일파에게 죄줄 것을 청하였다. 따라서, 공양왕의 폐위와 조선 건국의 중요한 명분을 세운 공로를 이루었다. 1392년(태조 1) 8월 조선개국공신 44인이 확정되고, 원종공신(原從功臣) 28인이 책봉될 때 원종공신이 되었다. 그러나 한달 뒤에 태조의 특지(特旨)에 의하여 개국공신 2등에 책록되어,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로서 의흥친군위도진무(義興親軍衛都鎭撫)를 겸하였다. 1394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서 죽었다. 질병에 시달린다는 소식을 듣고 태조는 국의(國醫)를 보내어 치료해 주고, 죽은 뒤에는 특별히 이화(李和)를 보내어 예장과 부의를 후하게 하였다. 문하시랑 찬성사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양무(襄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