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26대 왕 고종(高宗)의 외동딸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純宗)의 이복동생이다. 고종(高宗)이 회갑을 맞던 해인 1912년 5월 25일 궁녀인 복녕당(福寧堂) 양귀인(梁貴人)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측실이었기 때문에 옹주(翁主)라고 호칭했다. 덕혜라는 호를 하사받기 전까지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고, 1962년 이덕혜(李德惠)로 대한민국의 국적을 취득하였다.
양씨는 덕혜옹주를 낳고 복녕당이라는 당호를 하사받았다. 덕혜옹주는 고종의 고명딸로, 세심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고종에게는 모두 9남 4녀의 자녀가 있었지만 3남 1녀만이 성년이 될 때까지 생존하여 덕혜옹주가 외동딸이었다.
1916년 4월 덕수궁의 준명당(浚眀堂)에 다섯 살 난 덕혜를 위한 유치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덕혜가 외롭지 않게 동년배 5~6명을 함께 이곳에 다니게 했으며, 쿄구치 사다코(京口貞子)와 장옥식(張玉植)을 보모로 촉탁하였다.
덕혜옹주는 서녀(庶女)였다는 이유로 일본총독부에 의해 왕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여섯 살 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고종은 앞서 왕세자 이은처럼 일본에 강제로 데려가거나, 일본인과 결혼을 피하려고 하였다. 1919년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에 의해 황실의 시종 김황진(金璜鎭)의 조카 김장한(金章漢)과 약혼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고 시종 김황진은 덕수궁 출입을 금지당했으며 그해 1월 21일 고종은 갑자기 승하하였다.
고종 승하 후 덕혜옹주는 거처를 함녕전에서 어머니가 있는 광화당으로 옮겼다가, 고종의 혼전(魂殿)이 창덕궁으로 옮겨지면서 창덕궁 관물헌에 거처를 잡았다. 1921년 고종의 삼년상이 끝난 후 10살이 된 덕혜의 교육이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조선 황실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일제는 덕혜에게 철저한 일본식 교육을 시키려 했다.
1921년 덕혜옹주는 서울에서 히노데 소학교에 다녔다. 당시 히노데 소학교는 일본인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였으며 조선인은 고관의 자재 일부가 다녔던 학교였다. 그동안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다가 이무렵에 덕혜(德惠)라는 호를 내려받았다. 1925년 3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갔다. 3월 28일 오전 10시 경성발 열차를 타고 부산을 거쳐 시모노세키(下關)까지 선박으로 갔으며 도쿄까지는 열차로 이동하였다. 3월 30일 오전 8시 도쿄에 도착하자 이방자 여사가 마중을 나왔다. 1925년 4월 아오야마에 있는 여자학습원을 다녔는데, 항상 말이없고 급우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다고 전해진다.
1926년 순종이 위독하자 오빠 이은과 함께 귀국하였다가 4월 25일 순종이 사망하자 국장에 참석하지 못하고 5월 10일 일본으로 떠났다. 당시 일제는 덕혜옹주가 국장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1927년 1주기 때에 참석이 허락되었다. 1929년 5월 30일 생모인 양귀인(귀인양씨)이 유방암으로 영면하였으며 덕혜옹주는 귀국하였지만 복상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갔다. 1930년 봄부터 몽유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영친왕(英親王)의 거처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증세는 조발성치매증(조현증)으로 진단되었고, 이듬해 병세는 좋아졌다.
1931년 5월 쓰시마섬(對馬島) 도주의 후예인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정략 결혼하였고 다음해인 1932년 8월 14일 딸 정혜(正惠:일본명 마사에)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 후 덕혜옹주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으며 남편과 주변사람들의 간호에도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1946년 마츠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결국 1955년 다케유키와 결혼생활을 더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이혼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성을 따라 양덕혜(梁德惠)로 일본호적을 만들었으며 약 15년 동안 마츠자와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의 이혼시기에 대해서는 1951년, 1953년 설이 있지만 이방자 여사의 '흘러가는 대로'에 의하면 1955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외동딸이었던 정혜가 1956년에 결혼하였지만 이혼하였고 3개월 뒤 유서를 남기고 일본 남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실종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현해탄에서 투신하여 자살한 것으로 오해되고 있다.
덕혜옹주는 고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도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의 정치적 입지에 부정적 영향을 우려하여 귀국이 거부되었다. 서울신문 도쿄 특파원 등으로 활동한 김을한기자는 덕혜옹주의 귀국을 추진하였고, 1961년 11월 12일 미국을 방문하던 도중 일본 도쿄에 들른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와 만나 영친왕과 덕혜옹주의 귀국에 대한 협조를 약속하였다.
옹주는 입원한 1946년 이래 15년 가까이 마쓰자와 병원에서 지내다가 마침내 1962년 1월 26일 38년간의 일본 생활을 끝내고 영구 귀국하였다. 창덕궁 낙선재에 들러 순정효황후 윤씨를 만난 후에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하였다. 같은 해 2월 8일 '이덕혜'로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하였고, 같은 해 3월 28일 최고회의 상임위원회는 덕혜옹주에게 생계비를 지급하기 위하여 '구황실재산법' 개정법률안을 통과시켰다. 1967년 5월 4일 병세가 안정되어 병원에서 퇴원하였고, 이후 1968년 가을 창덕궁 낙선재 내의 수강재로 옮겨 기거하였다. 전 남편인 소 다케유키가 덕혜옹주를 만나기 위해 낙선재로 찾아왔지만 관계자들에 의해 면담이 거부되었다.
1989년 4월 21일 오전 11시 40분경에 창덕궁 수강재에서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金谷洞)에 있는 홍유릉(洪裕陵)에 묻혔다.
양씨는 덕혜옹주를 낳고 복녕당이라는 당호를 하사받았다. 덕혜옹주는 고종의 고명딸로, 세심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고종에게는 모두 9남 4녀의 자녀가 있었지만 3남 1녀만이 성년이 될 때까지 생존하여 덕혜옹주가 외동딸이었다.
1916년 4월 덕수궁의 준명당(浚眀堂)에 다섯 살 난 덕혜를 위한 유치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덕혜가 외롭지 않게 동년배 5~6명을 함께 이곳에 다니게 했으며, 쿄구치 사다코(京口貞子)와 장옥식(張玉植)을 보모로 촉탁하였다.
덕혜옹주는 서녀(庶女)였다는 이유로 일본총독부에 의해 왕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여섯 살 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고종은 앞서 왕세자 이은처럼 일본에 강제로 데려가거나, 일본인과 결혼을 피하려고 하였다. 1919년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에 의해 황실의 시종 김황진(金璜鎭)의 조카 김장한(金章漢)과 약혼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고 시종 김황진은 덕수궁 출입을 금지당했으며 그해 1월 21일 고종은 갑자기 승하하였다.
고종 승하 후 덕혜옹주는 거처를 함녕전에서 어머니가 있는 광화당으로 옮겼다가, 고종의 혼전(魂殿)이 창덕궁으로 옮겨지면서 창덕궁 관물헌에 거처를 잡았다. 1921년 고종의 삼년상이 끝난 후 10살이 된 덕혜의 교육이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조선 황실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일제는 덕혜에게 철저한 일본식 교육을 시키려 했다.
1921년 덕혜옹주는 서울에서 히노데 소학교에 다녔다. 당시 히노데 소학교는 일본인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였으며 조선인은 고관의 자재 일부가 다녔던 학교였다. 그동안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다가 이무렵에 덕혜(德惠)라는 호를 내려받았다. 1925년 3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갔다. 3월 28일 오전 10시 경성발 열차를 타고 부산을 거쳐 시모노세키(下關)까지 선박으로 갔으며 도쿄까지는 열차로 이동하였다. 3월 30일 오전 8시 도쿄에 도착하자 이방자 여사가 마중을 나왔다. 1925년 4월 아오야마에 있는 여자학습원을 다녔는데, 항상 말이없고 급우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다고 전해진다.
1926년 순종이 위독하자 오빠 이은과 함께 귀국하였다가 4월 25일 순종이 사망하자 국장에 참석하지 못하고 5월 10일 일본으로 떠났다. 당시 일제는 덕혜옹주가 국장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1927년 1주기 때에 참석이 허락되었다. 1929년 5월 30일 생모인 양귀인(귀인양씨)이 유방암으로 영면하였으며 덕혜옹주는 귀국하였지만 복상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갔다. 1930년 봄부터 몽유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영친왕(英親王)의 거처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증세는 조발성치매증(조현증)으로 진단되었고, 이듬해 병세는 좋아졌다.
1931년 5월 쓰시마섬(對馬島) 도주의 후예인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정략 결혼하였고 다음해인 1932년 8월 14일 딸 정혜(正惠:일본명 마사에)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 후 덕혜옹주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으며 남편과 주변사람들의 간호에도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1946년 마츠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결국 1955년 다케유키와 결혼생활을 더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이혼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성을 따라 양덕혜(梁德惠)로 일본호적을 만들었으며 약 15년 동안 마츠자와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의 이혼시기에 대해서는 1951년, 1953년 설이 있지만 이방자 여사의 '흘러가는 대로'에 의하면 1955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외동딸이었던 정혜가 1956년에 결혼하였지만 이혼하였고 3개월 뒤 유서를 남기고 일본 남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실종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현해탄에서 투신하여 자살한 것으로 오해되고 있다.
덕혜옹주는 고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도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의 정치적 입지에 부정적 영향을 우려하여 귀국이 거부되었다. 서울신문 도쿄 특파원 등으로 활동한 김을한기자는 덕혜옹주의 귀국을 추진하였고, 1961년 11월 12일 미국을 방문하던 도중 일본 도쿄에 들른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와 만나 영친왕과 덕혜옹주의 귀국에 대한 협조를 약속하였다.
옹주는 입원한 1946년 이래 15년 가까이 마쓰자와 병원에서 지내다가 마침내 1962년 1월 26일 38년간의 일본 생활을 끝내고 영구 귀국하였다. 창덕궁 낙선재에 들러 순정효황후 윤씨를 만난 후에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하였다. 같은 해 2월 8일 '이덕혜'로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하였고, 같은 해 3월 28일 최고회의 상임위원회는 덕혜옹주에게 생계비를 지급하기 위하여 '구황실재산법' 개정법률안을 통과시켰다. 1967년 5월 4일 병세가 안정되어 병원에서 퇴원하였고, 이후 1968년 가을 창덕궁 낙선재 내의 수강재로 옮겨 기거하였다. 전 남편인 소 다케유키가 덕혜옹주를 만나기 위해 낙선재로 찾아왔지만 관계자들에 의해 면담이 거부되었다.
1989년 4월 21일 오전 11시 40분경에 창덕궁 수강재에서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金谷洞)에 있는 홍유릉(洪裕陵)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