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이봉주(李鳳柱)
  • 전주이씨(全州李氏),  출생~사망 : 1970 ~  
마라톤선수.

1970년 10월 10일 충남 천안에서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87년 천성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천안농업고등학교 1학년 때 육상 장거리종목에 입문한 뒤, 광천고등학교로 전학하여 3학년 때는 전국체육대회(전국체전)에 출전해 10㎞에서 3위로 입상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1990년 서울시청 육상단에 입단하면서 서울시립대학교 야간대학에 진학했다. 이봉주는 1990년 10월 제71회 전국체전에서 처음으로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 2시간19분15초를 기록해 2위로 데뷔했고 1991년 제72회 전국체전에서는 1위에 올랐다. 이후 1992년 도쿄국제하프마라톤대회에서도 우승하며 제25회 바르셀로나 올림픽 국가대표선발전에 출전했으나 레이스 도중 넘어져 올림픽행이 좌절됐다. 하지만 1993년 제74회 전국체전과 호놀룰루마라톤에서 다시 정상을 차지해, 황영조가 은퇴한 한국 마라톤의 차세대 주자로 주목받았다.

서울시립대 졸업으로 서울시청 육상단을 떠나게 된 이봉주는 한국 마라톤의 대부 정봉수 감독의 끈질긴 권유로 1993년 코오롱스포츠 육상단과 계약하였다. 그리고 1994년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10분벽을 돌파(2시간9분59초)하고 1995년 동아마라톤대회 우승을 거쳐, 이듬해 3월 동아마라톤대회에서는 2시간8분26초(2위)로 기록을 단축하며 올림픽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마침내 1996년 제26회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3초 차이로 은메달을 따냈고, 그해 12월 제50회 후쿠오카국제마라톤대회에서는 1위를 차지했다. 또 1998년 로테르담마라톤대회에서 한국최고기록(2시간7분44초)으로 준우승, 같은 해 제13회 방콕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달성했다.

그러나 1999년 런던마라톤대회에서 저조한 기록으로 12위에 머문 뒤, 정봉수 감독과의 갈등 및 소속팀인 코오롱의 부당한 처우에 반발하며 당시 임상규 감독, 오인환 코치 등과 코오롱스포츠 육상단을 탈퇴했다. 이로 인해 선수생활의 최대 위기를 맞았던 그는 무소속으로 출전한 2000년 2월 도쿄국제마라톤대회에서 준우승을 하며 2시간7분20초를 수립, 자신이 세웠던 한국최고기록 경신하고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했다. 그리고 2000년 6월 2일 창단한 삼성전자 육상단에 임상규 감독, 오인환 코치와 함께 입단해 2009년까지 활약하였다.

이봉주는 2000년 제27회 시드니 올림픽 레이스 도중 넘어지며 24위에 그쳤으나, 2개월 만에 후쿠오카국제마라톤대회로 준우승(2시간9분4초)을 거머쥐었다. 또한 2001년 제105회 보스턴마라톤대회 우승에 이어, 2002년 제14회 부산아시안게임에서 2연패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 후 2004년 제28회 아테네 올림픽(14위)과 2008년 제29회 베이징 올림픽(28위)을 마지막으로 마라톤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 2007년 서울국제마라톤대회까지 2시간8분4초로 우승을 석권한 이봉주는 2009년 3월, 서울국제마라톤대회를 2시간16분46초(14위)로 마감하며 40세의 나이로 현역에서도 공식 은퇴하였다. 이로써 마라톤 풀코스 40회 완주 기록을 보유하게 된 이봉주의 한국최고기록(2시간7분20초)은 2013년 1월까지 12년간 깨지지 않고 남아 있다.

한편 이봉주는 2009년 체육훈장 청룡장과 제10회 대한민국 국회대상 공로상을 수상했으며, 2010년 동아마라톤 홍보대사와 2014년 제17회 인천아시안게임 홍보대사로 위촉되었다. 2010년 2월부터는 손기정기념재단 이사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