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충청남도 보령에서 태어났다. 일본에서 음악공부를 하다가 박용구, 황문평 등과 함께 컬럼비아가극단에 입단하여 활동하면서 타고난 기량을 발휘하였다. 윤부길은 이 가극단에서 그는 안기영(安基永) 작곡의 가극 '콩쥐팥쥐'와 '견우직녀'에 출연하며 호평을 받았다. 이 두 작품은 우리나라 최초의 오페라이기도 하다.
이후 가극단에서 공연을 할 때마다 희극적적인 요소를 선보여 원로연예인들은 이 공연들을 회상하면서 한국 최초의 개그맨이라 불렀다. 본인의 재능은 꾸준히 해온 자신만의 자기계발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성악 뿐만 아니라 시나리오 집필, 작곡, 반주, 의상 그리고 무대장치에도 능했다. 8.15광복 후에는 처음으로 인형을 이용한 복화술을 보여주기도 했다. 8.15 해방 후에는 KPK악극단, 윤부길악단을 결성하여 활동하며 대중음악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윤부길은 가요 작사도 하였는데 대표적으로 1953년작 실화노래 황정자의 '처녀 뱃사공', 1957년작 심연옥의 '시골버스 여차장' 등 이다.
그는 광복 후 '부길부길쇼'를 이끌다가 지병을 견디지 못하고 천안에서 목화자로 있는 형의 교회로 들어갔다. 1957년 새벽 예배 중에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향년 45세.
오사카 공연에서 실패한 라미라가극단 이후 무용수 최승희의 수제자인 무용수 고향선(高香線, 본명은 성경자)과 결혼하여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차남인 윤항기(尹恒基)는 가수겸 목회자로, 둘째딸인 윤복희(尹福姬)는 가수와 뮤지컬 배우로도 활동하고 있다.
1912년 충청남도 보령에서 태어났다. 일본에서 음악공부를 하다가 박용구, 황문평 등과 함께 컬럼비아가극단에 입단하여 활동하면서 타고난 기량을 발휘하였다. 윤부길은 이 가극단에서 그는 안기영(安基永) 작곡의 가극 '콩쥐팥쥐'와 '견우직녀'에 출연하며 호평을 받았다. 이 두 작품은 우리나라 최초의 오페라이기도 하다.
이후 가극단에서 공연을 할 때마다 희극적적인 요소를 선보여 원로연예인들은 이 공연들을 회상하면서 한국 최초의 개그맨이라 불렀다. 본인의 재능은 꾸준히 해온 자신만의 자기계발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성악 뿐만 아니라 시나리오 집필, 작곡, 반주, 의상 그리고 무대장치에도 능했다. 8.15광복 후에는 처음으로 인형을 이용한 복화술을 보여주기도 했다. 8.15 해방 후에는 KPK악극단, 윤부길악단을 결성하여 활동하며 대중음악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윤부길은 가요 작사도 하였는데 대표적으로 1953년작 실화노래 황정자의 '처녀 뱃사공', 1957년작 심연옥의 '시골버스 여차장' 등 이다.
그는 광복 후 '부길부길쇼'를 이끌다가 지병을 견디지 못하고 천안에서 목화자로 있는 형의 교회로 들어갔다. 1957년 새벽 예배 중에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향년 45세.
오사카 공연에서 실패한 라미라가극단 이후 무용수 최승희의 수제자인 무용수 고향선(高香線, 본명은 성경자)과 결혼하여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차남인 윤항기(尹恒基)는 가수겸 목회자로, 둘째딸인 윤복희(尹福姬)는 가수와 뮤지컬 배우로도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