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2월 4일 전라남도 여수 봉강동에서 태어났다. 여수 수산중학교를 거쳐 순천사범학교 체육과를 졸업한 뒤, 1950년여수소라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교사를 거쳐 1951년 수도사단 선무공작대에 입대 종군하였다. 그 후 악극단에서 연극 '나그네 설음'에서 첫주연을 하면서 연기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1955년 이강천(李康天) 감독의 '격퇴'로 영화계에 데뷔한 뒤, 이듬해 '5인의 해병'을 통해 액션배우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이후 '마도로스 박'(1964), '명동 노신사'(1970), '운전수 용팔이'(1971) 등 명동 시리즈와 용팔이 시리즈를 통해 허장강(許長江)·장동휘(張東輝) 등과 함께 1960~1970년대 대표적인 액션스타로 인기를 끌었다. 이 때부터 본명과 함께 '마도로스 박', '용팔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액션뿐 아니라 문예물에서도 폭넓은 연기를 펼쳐 1967년 '메밀꽃 필 무렵'으로 남도영화제·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또 투박한 전라도 사투리와 호쾌한 액션, 독특한 표정연기로 각종 영화상을 받았는데, 1967년에는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로 대종상 남우조연상과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1970년대에는 직접 제작·감독·주연을 맡은 10여 편의 영화를 만들었으나, 흥행에는 실패하었다. 총 5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였고, 그 가운데 80여 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그밖의 출연작으로는 '고발'(1967, 대종상 남우주연상), '카인의 후예'(1968, 대종상 남우조연상), '돌아온 팔도사나이'(1969,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 '애꾸눈 박'(1970), '명동 졸업생'(1971), '돌아온 용팔이'(1983) 등이 있다.
1995년 4월 3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으며 막내인 아들은 배우 박준규이다.
1930년 2월 4일 전라남도 여수 봉강동에서 태어났다. 여수 수산중학교를 거쳐 순천사범학교 체육과를 졸업한 뒤, 1950년여수소라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교사를 거쳐 1951년 수도사단 선무공작대에 입대 종군하였다. 그 후 악극단에서 연극 '나그네 설음'에서 첫주연을 하면서 연기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1955년 이강천(李康天) 감독의 '격퇴'로 영화계에 데뷔한 뒤, 이듬해 '5인의 해병'을 통해 액션배우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이후 '마도로스 박'(1964), '명동 노신사'(1970), '운전수 용팔이'(1971) 등 명동 시리즈와 용팔이 시리즈를 통해 허장강(許長江)·장동휘(張東輝) 등과 함께 1960~1970년대 대표적인 액션스타로 인기를 끌었다. 이 때부터 본명과 함께 '마도로스 박', '용팔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액션뿐 아니라 문예물에서도 폭넓은 연기를 펼쳐 1967년 '메밀꽃 필 무렵'으로 남도영화제·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또 투박한 전라도 사투리와 호쾌한 액션, 독특한 표정연기로 각종 영화상을 받았는데, 1967년에는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로 대종상 남우조연상과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1970년대에는 직접 제작·감독·주연을 맡은 10여 편의 영화를 만들었으나, 흥행에는 실패하었다. 총 5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였고, 그 가운데 80여 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그밖의 출연작으로는 '고발'(1967, 대종상 남우주연상), '카인의 후예'(1968, 대종상 남우조연상), '돌아온 팔도사나이'(1969,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 '애꾸눈 박'(1970), '명동 졸업생'(1971), '돌아온 용팔이'(1983) 등이 있다.
1995년 4월 3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으며 막내인 아들은 배우 박준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