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북도 청진에서 출생하였으며 한때 함경북도 회령과 함경북도 경성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냈다. 함경북도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도일하여 1945년 일본 도쿄 미술전문학교를 중퇴했다.
1946년 서양화가로 화단에 등단한 적이 있었고 1948년 영화 '희망의 마을'로 영화 미술감독 데뷔하였으며 이듬해 1949년 영화 '여성일기'를 미술감독하였고 이어 같은 해 1949년 영화 '파시'로 영화 조감독 데뷔하였으며 1952년에 16mm 영화인 '악야'라는 작품으로써 본격적인 영화감독으로 데뷔하였다.
영화배우였던 최은희(崔銀姬)와 1953년에 결혼하여 2남 2녀를 두었으며, 장남인 신정균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화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아내인 최은희가 1978년 1월 14일에 홍콩에서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북된 이후, 그녀의 행방을 찾다가 그 역시 같은 해 7월 19일에 홍콩에서 납북되었다. 북한에서 신필름영화촬영소 총장을 맡으면서 '소금', '불가사리' 등의 영화를 제작했다. 1986년 3월 13일에 최은희와 함께 오스트리아 빈에 있던 도중에, 미국 대사관으로 탈출하여 탈북에 성공했다.
1987년 김현희가 일으켰던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이 일어난 후에는 이 사건을 다룬 반공 영화인 '마유미'를 제작하기도 했다. 1994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을 지냈다. 2000년에 미국에서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이후 간 이식 수술을 받았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2006년 4월 11일 지병으로 사망했다. 묘소는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북가현리 소재 천주교 공원묘지이다. 향년 81세
함경북도 청진에서 출생하였으며 한때 함경북도 회령과 함경북도 경성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냈다. 함경북도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도일하여 1945년 일본 도쿄 미술전문학교를 중퇴했다.
1946년 서양화가로 화단에 등단한 적이 있었고 1948년 영화 '희망의 마을'로 영화 미술감독 데뷔하였으며 이듬해 1949년 영화 '여성일기'를 미술감독하였고 이어 같은 해 1949년 영화 '파시'로 영화 조감독 데뷔하였으며 1952년에 16mm 영화인 '악야'라는 작품으로써 본격적인 영화감독으로 데뷔하였다.
영화배우였던 최은희(崔銀姬)와 1953년에 결혼하여 2남 2녀를 두었으며, 장남인 신정균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화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아내인 최은희가 1978년 1월 14일에 홍콩에서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북된 이후, 그녀의 행방을 찾다가 그 역시 같은 해 7월 19일에 홍콩에서 납북되었다. 북한에서 신필름영화촬영소 총장을 맡으면서 '소금', '불가사리' 등의 영화를 제작했다. 1986년 3월 13일에 최은희와 함께 오스트리아 빈에 있던 도중에, 미국 대사관으로 탈출하여 탈북에 성공했다.
1987년 김현희가 일으켰던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이 일어난 후에는 이 사건을 다룬 반공 영화인 '마유미'를 제작하기도 했다. 1994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을 지냈다. 2000년에 미국에서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이후 간 이식 수술을 받았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2006년 4월 11일 지병으로 사망했다. 묘소는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북가현리 소재 천주교 공원묘지이다. 향년 8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