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2월 18일 서울 운니동에서 아버지 김승환(金升煥)과 어머니 한윤명(韓潤明) 사이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8세에 승동보통학교에 입학한 후 병으로 언어장애와 청각을 상실하였다. 1930년 이당 김은호의 화숙인 이묵헌(以墨軒)에 들어가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첫 입선을 하였고 1937년부터 1940년까지 4년 연속 특선을 하여 추천작가가 되었다. 조선미술전람회 추천작가라는 위치와 김은호의 후원에 힘입어 일제 식민지시대 유명 작가로 성장하였다.
해방이 되자 1946년 5월 '해방과 동양화의 진로', 12월 '미술운동과 대중화문제' 등의 글을 발표하며 동양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나아가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동양화가 추상 예술의 풍조를 따라 시대성에 발맞춰 전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김영기와 함께 ‘현대동양화’ 운동을 주창하였다.
1946년 역시 한국화가인 우향 박래현과 결혼했고 다음 해 제1회 ‘우향-운보 부부전’을 개최하였다. 이 전시회는 한국 미술계 최초의 부부전이었으며 1971년 제17회전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특히 하와이 호놀루루 동서문화교류센터와 뉴욕 동남아시아 박물관의 초청으로 개최한 부부전은 해외미술사찰의 계기가 되었다.
홍익대학교와 수도여사사범대학 교수로 후진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고 김은호 제자들의 모임인 후소회 회장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1957년에는 당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비판적이었던 작가들과 함께 새로운 동양화 모색을 주창하며 백양회를 결성하였다.
일제 식민지 시대 김기창의 작품은 김은호의 화풍을 충실하게 수용한 채색인물화였다. 그러나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부인 박래현과 함께 서양 입체주의의 영향을 보여주는 실험적인 작품을 많이 제작하였다.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완전한 추상화 단계에 접어들었는데 1967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한국대표로 미국과 멕시코 등을 시찰한 후 다시 작품에 변화를 보였다. 당시 그의 작품들은 강렬한 필선과 적색, 황색이 두드러졌으며 1970년대의 청록산수 연작과 바보산수, 민화풍의 화조화 등으로 이어졌다. 또한 1973년부터 세종대왕, 김정호, 을지문덕 등 역사위인들의 영정 제작을 많이 담당하였다.
청각장애우들을 위한 활동도 활발하게 펼쳤는데 1979년 한국농아복지회를 창설하여 초대회장에 취임하였고 1984년에는 서울 역삼동에 청각장애인을 위한 복지센터인 청음회관을 설립하였다.
2001년 1월 23일 8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주요 작품으로 가을(1934), 복덕방(1953), 보리타작(1956), 새와 여인(1963), 소와 여인(1965), 아악의 리듬(1967), 태양을 먹은 새(1968), 나비의 꿈(1968), 군마도(1970), 웅(雄)(1970), 새벽 종소리(1975), 바보화조(1976), 청산도(1976), 오수(午睡)(1976), 달밤(1978), 바보산수(1987), 시집가는 날(1988) 등이 있다.
1913년 2월 18일 서울 운니동에서 아버지 김승환(金升煥)과 어머니 한윤명(韓潤明) 사이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8세에 승동보통학교에 입학한 후 병으로 언어장애와 청각을 상실하였다. 1930년 이당 김은호의 화숙인 이묵헌(以墨軒)에 들어가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첫 입선을 하였고 1937년부터 1940년까지 4년 연속 특선을 하여 추천작가가 되었다. 조선미술전람회 추천작가라는 위치와 김은호의 후원에 힘입어 일제 식민지시대 유명 작가로 성장하였다.
해방이 되자 1946년 5월 '해방과 동양화의 진로', 12월 '미술운동과 대중화문제' 등의 글을 발표하며 동양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나아가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동양화가 추상 예술의 풍조를 따라 시대성에 발맞춰 전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김영기와 함께 ‘현대동양화’ 운동을 주창하였다.
1946년 역시 한국화가인 우향 박래현과 결혼했고 다음 해 제1회 ‘우향-운보 부부전’을 개최하였다. 이 전시회는 한국 미술계 최초의 부부전이었으며 1971년 제17회전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특히 하와이 호놀루루 동서문화교류센터와 뉴욕 동남아시아 박물관의 초청으로 개최한 부부전은 해외미술사찰의 계기가 되었다.
홍익대학교와 수도여사사범대학 교수로 후진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고 김은호 제자들의 모임인 후소회 회장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1957년에는 당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비판적이었던 작가들과 함께 새로운 동양화 모색을 주창하며 백양회를 결성하였다.
일제 식민지 시대 김기창의 작품은 김은호의 화풍을 충실하게 수용한 채색인물화였다. 그러나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부인 박래현과 함께 서양 입체주의의 영향을 보여주는 실험적인 작품을 많이 제작하였다.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완전한 추상화 단계에 접어들었는데 1967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한국대표로 미국과 멕시코 등을 시찰한 후 다시 작품에 변화를 보였다. 당시 그의 작품들은 강렬한 필선과 적색, 황색이 두드러졌으며 1970년대의 청록산수 연작과 바보산수, 민화풍의 화조화 등으로 이어졌다. 또한 1973년부터 세종대왕, 김정호, 을지문덕 등 역사위인들의 영정 제작을 많이 담당하였다.
청각장애우들을 위한 활동도 활발하게 펼쳤는데 1979년 한국농아복지회를 창설하여 초대회장에 취임하였고 1984년에는 서울 역삼동에 청각장애인을 위한 복지센터인 청음회관을 설립하였다.
2001년 1월 23일 8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주요 작품으로 가을(1934), 복덕방(1953), 보리타작(1956), 새와 여인(1963), 소와 여인(1965), 아악의 리듬(1967), 태양을 먹은 새(1968), 나비의 꿈(1968), 군마도(1970), 웅(雄)(1970), 새벽 종소리(1975), 바보화조(1976), 청산도(1976), 오수(午睡)(1976), 달밤(1978), 바보산수(1987), 시집가는 날(198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