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9월 7일 경상북도 영일에서 아버지 이석정(李錫政)과 어머니 이사봉(李泗峰)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7세까지 향리에서 한학과 4년제 사립학교에서 신학문을 수학하고 흥해공립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 졸업하였다.
1930년영일군 산림기수보로 취직하였다. 1933년 일본으로 건너가 각고 끝에 자수성가하여, 1935년 일본에서 아사히공예사(朝工藝主式會社)라는 모자공장을 지어 사업에 성공한 뒤 1951년 도쿄에 삼경물산을 세웠다. 그리고 삼경물산은 1953년 한국에 나일론을 독점 공급하기 시작했다. 국내에 나일론이 처음으로 들어온 것이 이때다. 이원만 회장은 1954년 귀국해 코오롱그룹의 모태인 개명상사(나일론 수입 업체)를 세웠다. 또 같은 해 일본 삼경물산의 서울 사무소인 한국삼경물산(주)을 세웠다. 이 회장의 아들 이동찬(李東燦) 코오롱그룹 전 회장이 한국삼경물산의 대표를 맡았다. 1957년 4월 12일 이원만 회장은 나일론을 직접 생산할 목적으로 대구에 한국나이롱(현, 코오롱) 주식회사를 세웠다. 코오롱은 코리아나일론의 줄임말로, 국내 최초 나일론 생산으로 한국의 섬유산업을 이끌었다. 이후 전자, 유통, 건설, 화학, 제약 등 다양한 사업으로 진출 그룹체계를 확립한다. 한때 재계순위 10위권 이내였던 코오롱은 IMF를 거치면서 위기를 겪게되나 성공적인 사업 구조조정 등의 과정을 통해 현재 30대 대기업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1960년에는 경상북도에서 민주당으로 출마하여 참의원에 당선. 1963년 국제연합협회 세계연맹본부회의 대표로 제18차 뉴욕총회에 참석하였으며, 한국수출산업공단 창립위원회 위원장, 대구 동구에서 공화당 소속으로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하여 상공위원으로 활약했다.
1966년 국제연합 한국협회 부회장에 피선되었으며, 동대구역건설 추진위원장, 대한속기사협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67년 한국수출공단 준공식에서 대통령 유공표창을 받았으며,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농림분과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68년 삼경개발주식회사 사장, 1976년 코오롱그룹 회장, 1977년 코오롱그룹 명예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94년 금탑산업훈장이 추서되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朴正熙)의장에게 농공병진공업입국·수출입국을 건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방향을 제시하였으며, 구로공단·구미공단의 조성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한국의 합섬섬유시대를 개척했으며, 미곡다수확품종인 통일벼 개발의 선구역할을 하였으며, 산림녹화를 위해 전신주와 레일침목을 콘크리트화, 프로판가스 연로사용으로 연료의 대체, 택지절약을 위한 아파트건설을 주장했다. 저서로는 '나의 정경오십년(政經五十年)'(1994)이 있다.
1904년 9월 7일 경상북도 영일에서 아버지 이석정(李錫政)과 어머니 이사봉(李泗峰)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7세까지 향리에서 한학과 4년제 사립학교에서 신학문을 수학하고 흥해공립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 졸업하였다.
1930년영일군 산림기수보로 취직하였다. 1933년 일본으로 건너가 각고 끝에 자수성가하여, 1935년 일본에서 아사히공예사(朝工藝主式會社)라는 모자공장을 지어 사업에 성공한 뒤 1951년 도쿄에 삼경물산을 세웠다. 그리고 삼경물산은 1953년 한국에 나일론을 독점 공급하기 시작했다. 국내에 나일론이 처음으로 들어온 것이 이때다. 이원만 회장은 1954년 귀국해 코오롱그룹의 모태인 개명상사(나일론 수입 업체)를 세웠다. 또 같은 해 일본 삼경물산의 서울 사무소인 한국삼경물산(주)을 세웠다. 이 회장의 아들 이동찬(李東燦) 코오롱그룹 전 회장이 한국삼경물산의 대표를 맡았다. 1957년 4월 12일 이원만 회장은 나일론을 직접 생산할 목적으로 대구에 한국나이롱(현, 코오롱) 주식회사를 세웠다. 코오롱은 코리아나일론의 줄임말로, 국내 최초 나일론 생산으로 한국의 섬유산업을 이끌었다. 이후 전자, 유통, 건설, 화학, 제약 등 다양한 사업으로 진출 그룹체계를 확립한다. 한때 재계순위 10위권 이내였던 코오롱은 IMF를 거치면서 위기를 겪게되나 성공적인 사업 구조조정 등의 과정을 통해 현재 30대 대기업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1960년에는 경상북도에서 민주당으로 출마하여 참의원에 당선. 1963년 국제연합협회 세계연맹본부회의 대표로 제18차 뉴욕총회에 참석하였으며, 한국수출산업공단 창립위원회 위원장, 대구 동구에서 공화당 소속으로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하여 상공위원으로 활약했다.
1966년 국제연합 한국협회 부회장에 피선되었으며, 동대구역건설 추진위원장, 대한속기사협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67년 한국수출공단 준공식에서 대통령 유공표창을 받았으며,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농림분과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68년 삼경개발주식회사 사장, 1976년 코오롱그룹 회장, 1977년 코오롱그룹 명예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94년 금탑산업훈장이 추서되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朴正熙)의장에게 농공병진공업입국·수출입국을 건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방향을 제시하였으며, 구로공단·구미공단의 조성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한국의 합섬섬유시대를 개척했으며, 미곡다수확품종인 통일벼 개발의 선구역할을 하였으며, 산림녹화를 위해 전신주와 레일침목을 콘크리트화, 프로판가스 연로사용으로 연료의 대체, 택지절약을 위한 아파트건설을 주장했다. 저서로는 '나의 정경오십년(政經五十年)'(1994)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