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12월 19일에 대구에서 아버지 우당(愚堂) 김용하(金容夏) 선생과 어머니 전인항(全仁恒) 사이에서 6남매 중 4남으로 태어났다.
제주도지사를 역임한 아버지는 전직 대통령 박정희의 대구사범학교 시절 은사였다. 아버지가 한국 전쟁으로 인해 납북되고 형들이 군대에 징집되면서 15세에 소년가장이 되었지만 스스로 독학하며 공부하였다. 경기중학교 시절 건전하지 않은 학생들과 어울리는 탓에 경기고등학교에 1년 늦게 입학하여 1956년에 졸업하였다.
1960년 25세에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1966년까지 한성실업에서 근무하다가, 1967년 32세에 서울 충무로에서 대우실업을 설립했다. 자본금은 500만원이었지만, 동남아시아, 미국 시장에서 성공하여 1970년대 초반부터 대우건설, 대우증권, 대우전자, 대우조선 등을 창설하며 1974년에 1억불의 수출탑을 달성하는데 성공하며 신흥 재벌이 되었다. 1981년에 (주)대우를 창립하고 스스로 회장의 자리에 올랐다. 1982년 1월에는 대우그룹을 출범시켰고 새한자동차를 인수하며 재계 4위에 올랐다.
1989년에 펴낸 자서전인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92년 제14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출마하려 했으나 김영삼의 압박으로 불발되었다. 1993년 대우그룹은 세계경영을 선포하였고 또한 김우중은 1987년부터 1993년까지 대한축구협회의 회장을 맡았다. 하지만 1990년 장남 김선재를 잃고, 1996년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에 연루되었으나 위기를 잘 넘기며 대우그룹을 1998년에 재계 2위로 이끌며 성장시켰다.
그러나 1997년 IMF 구제금융으로 한국경제가 큰 타격을 받았고, 그로 인한 여파로 1999년 11월 1일 김우중은 13명의 대우그룹 사장단들과 함께 경영포기 및 회장직을 사퇴하였다. 그 후 5년 8개월 동안 해외에서 도피 생활을 지속하다가, 2005년 6월 14일 입국하였다. 분식회계 및 사기대출, 횡령 및 국외 재산도피 혐의로 징역형을 살다가 2007년 12월 31일 대통령 특사로 사면되었다.
1936년 12월 19일에 대구에서 아버지 우당(愚堂) 김용하(金容夏) 선생과 어머니 전인항(全仁恒) 사이에서 6남매 중 4남으로 태어났다.
제주도지사를 역임한 아버지는 전직 대통령 박정희의 대구사범학교 시절 은사였다. 아버지가 한국 전쟁으로 인해 납북되고 형들이 군대에 징집되면서 15세에 소년가장이 되었지만 스스로 독학하며 공부하였다. 경기중학교 시절 건전하지 않은 학생들과 어울리는 탓에 경기고등학교에 1년 늦게 입학하여 1956년에 졸업하였다.
1960년 25세에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1966년까지 한성실업에서 근무하다가, 1967년 32세에 서울 충무로에서 대우실업을 설립했다. 자본금은 500만원이었지만, 동남아시아, 미국 시장에서 성공하여 1970년대 초반부터 대우건설, 대우증권, 대우전자, 대우조선 등을 창설하며 1974년에 1억불의 수출탑을 달성하는데 성공하며 신흥 재벌이 되었다. 1981년에 (주)대우를 창립하고 스스로 회장의 자리에 올랐다. 1982년 1월에는 대우그룹을 출범시켰고 새한자동차를 인수하며 재계 4위에 올랐다.
1989년에 펴낸 자서전인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92년 제14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출마하려 했으나 김영삼의 압박으로 불발되었다. 1993년 대우그룹은 세계경영을 선포하였고 또한 김우중은 1987년부터 1993년까지 대한축구협회의 회장을 맡았다. 하지만 1990년 장남 김선재를 잃고, 1996년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에 연루되었으나 위기를 잘 넘기며 대우그룹을 1998년에 재계 2위로 이끌며 성장시켰다.
그러나 1997년 IMF 구제금융으로 한국경제가 큰 타격을 받았고, 그로 인한 여파로 1999년 11월 1일 김우중은 13명의 대우그룹 사장단들과 함께 경영포기 및 회장직을 사퇴하였다. 그 후 5년 8개월 동안 해외에서 도피 생활을 지속하다가, 2005년 6월 14일 입국하였다. 분식회계 및 사기대출, 횡령 및 국외 재산도피 혐의로 징역형을 살다가 2007년 12월 31일 대통령 특사로 사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