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10월 29일 경상북도 칠곡에서 태어났다. 대구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북고등학교)를 거쳐 1943년 경성제국대학(지금의 서울대학교) 법문학부를 졸업한 뒤, 지금의 행정고시 격인 고등문과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여 한국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일본 도쿄의 상무성에서 근무하였다. 일본 군수성의 군수 관리관으로 일하면서 광복을 맞이하였고, 광복 후에는 대구대학 교수로 근무하였다.
1954년 관계에 복귀하여 상공부 전기국·광무국·공업국 국장을 지냈고, 1957년 부흥부 차관과 외자청 청장서리를 거쳐 39세 때인 1959년 부흥부 장관으로 발탁되었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난 뒤 3·15부정선거에 연루되어 2년여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1968년 동해전력 사장을 시작으로 쌍룡양회, 쌍룡산업 사장 등 재계에 몸 담고 있다가 1973년 민주공화당의 공천을 받아 군위·성주·칠곡·선산 지역구에 출마하여 제9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제10대 국회의원에도 재선되었다.
1975년 보건사회부 장관, 1978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되었고, 1979년 10·26사건을 맞아 국무총리직을 수행하였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기로 결의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그 다음날 국무총리 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헌법개정심의위원장을 맡아 제5공화국 헌법을 주도하였으며, 1981년 국정자문위원, 1983년 한일협력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정계에서 물러난 뒤, 1986년 삼성물산 회장 겸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 1988년 행정개혁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99년에는 전경련 기업윤리위원회 위원장과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의 회장 직을 맡는 등 말년까지 활동을 쉬지 않았다. 2006년 2월 척추골절로 입원하여 치료를 받아오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2007년 4월 사망하였다. 제1공화국 탄생에서부터 제5공화국 출범에 이르기까지 정계·관계와 재계를 오가며 4·19혁명과 5·16군사정변, 12·12사태, 1980년 '서울의 봄' 등 파란 많은 한국 현대사의 중심에 있었다. 1973년 금탄산업훈장, 1978년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
1920년 10월 29일 경상북도 칠곡에서 태어났다. 대구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북고등학교)를 거쳐 1943년 경성제국대학(지금의 서울대학교) 법문학부를 졸업한 뒤, 지금의 행정고시 격인 고등문과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여 한국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일본 도쿄의 상무성에서 근무하였다. 일본 군수성의 군수 관리관으로 일하면서 광복을 맞이하였고, 광복 후에는 대구대학 교수로 근무하였다.
1954년 관계에 복귀하여 상공부 전기국·광무국·공업국 국장을 지냈고, 1957년 부흥부 차관과 외자청 청장서리를 거쳐 39세 때인 1959년 부흥부 장관으로 발탁되었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난 뒤 3·15부정선거에 연루되어 2년여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1968년 동해전력 사장을 시작으로 쌍룡양회, 쌍룡산업 사장 등 재계에 몸 담고 있다가 1973년 민주공화당의 공천을 받아 군위·성주·칠곡·선산 지역구에 출마하여 제9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제10대 국회의원에도 재선되었다.
1975년 보건사회부 장관, 1978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되었고, 1979년 10·26사건을 맞아 국무총리직을 수행하였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기로 결의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그 다음날 국무총리 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헌법개정심의위원장을 맡아 제5공화국 헌법을 주도하였으며, 1981년 국정자문위원, 1983년 한일협력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정계에서 물러난 뒤, 1986년 삼성물산 회장 겸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 1988년 행정개혁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99년에는 전경련 기업윤리위원회 위원장과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의 회장 직을 맡는 등 말년까지 활동을 쉬지 않았다. 2006년 2월 척추골절로 입원하여 치료를 받아오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2007년 4월 사망하였다. 제1공화국 탄생에서부터 제5공화국 출범에 이르기까지 정계·관계와 재계를 오가며 4·19혁명과 5·16군사정변, 12·12사태, 1980년 '서울의 봄' 등 파란 많은 한국 현대사의 중심에 있었다. 1973년 금탄산업훈장, 1978년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