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으며, 무오사화(戊午士禍)때 부자(父子)와 형제(兄弟)들이 호남(湖南)으로 함께 귀양갔으나 중종조에 와서 원통함을 씻었고, 그 후 13년 무인년에 왕이 조정(朝廷)에서 정암 조광조에게 김일손 후사(后嗣)가 있는가 하고 물으니, 계자(系子) 대장(大壯)이가 봉사(奉祀)하고 있다고 고(告)하였더니 특별히 조사(調査)하여 선릉참봉(宣陵參奉)을 제수하였다. 음직으로 주부(主簿)를 거쳐 여름에 감찰(監察) 가을에 용궁현감(龍宮縣監)을 받았다. 중종 을유(1525년)에 창녕현감(昌寧縣監)으로 제수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549년 11월 20일에 졸하니, 향년 57세다. 묘소는 전북 남원시(南原市) 만행산(萬行山)아래 구라치(求螺峙)에 갑좌이며 갈(碣)이 있다. 헌종2년 (임인년) 백동사(白洞祠)에서 제향하고있다.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으며, 무오사화(戊午士禍)때 부자(父子)와 형제(兄弟)들이 호남(湖南)으로 함께 귀양갔으나 중종조에 와서 원통함을 씻었고, 그 후 13년 무인년에 왕이 조정(朝廷)에서 정암 조광조에게 김일손 후사(后嗣)가 있는가 하고 물으니, 계자(系子) 대장(大壯)이가 봉사(奉祀)하고 있다고 고(告)하였더니 특별히 조사(調査)하여 선릉참봉(宣陵參奉)을 제수하였다. 음직으로 주부(主簿)를 거쳐 여름에 감찰(監察) 가을에 용궁현감(龍宮縣監)을 받았다. 중종 을유(1525년)에 창녕현감(昌寧縣監)으로 제수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549년 11월 20일에 졸하니, 향년 57세다. 묘소는 전북 남원시(南原市) 만행산(萬行山)아래 구라치(求螺峙)에 갑좌이며 갈(碣)이 있다. 헌종2년 (임인년) 백동사(白洞祠)에서 제향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