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업(學業)이 크게 성취(成就)하니 성종 임인년(1482)에 알성시(謁聖試)에 응시(應試)하여 형제(형 동창공과 같이)분이 같이 급제하니, 백씨(伯氏) 동창공(東窓公)은 장원 제이(第二)이고, 공(公)은 장원(壯元)이었다.
벼슬은 사헌부감찰과 이조와 병조좌랑을 지냈으나 노모의 봉양(奉養)을 위하여 창녕현감으로 고향에 돌아갔다. 미기(未幾 : 동안이 얼마 길지 아니함)에 기관(棄官 : 벼슬을 버림)하였다가 임자년에 형조좌랑으로 다시 조정(朝廷)에 들어가 형조판서 이봉(李封)과 국사(國事)를 천집(擅執) 하다가 같은해 9월 16일에 별세하니 향년 38세다.
1455년 11월 11일에 출생하여 1492년 9월 16일에 별세하고 동년(同年) 11월 5일에 장례하였다. 묘(墓)는 경기도(京幾道) 용인시(龍仁市) 포곡면(蒲谷面) 개곡리(介谷里) 외조부 묘 서편의 자좌(子坐)이다.
어릴적부터 효우출천(孝友出天)하였고 제씨(弟氏) 탁영공(濯纓公)과 함께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하면서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과 강론(講論)하였다.
학업(學業)이 크게 성취(成就)하니 성종 임인년(1482)에 알성시(謁聖試)에 응시(應試)하여 형제(형 동창공과 같이)분이 같이 급제하니, 백씨(伯氏) 동창공(東窓公)은 장원 제이(第二)이고, 공(公)은 장원(壯元)이었다.
벼슬은 사헌부감찰과 이조와 병조좌랑을 지냈으나 노모의 봉양(奉養)을 위하여 창녕현감으로 고향에 돌아갔다. 미기(未幾 : 동안이 얼마 길지 아니함)에 기관(棄官 : 벼슬을 버림)하였다가 임자년에 형조좌랑으로 다시 조정(朝廷)에 들어가 형조판서 이봉(李封)과 국사(國事)를 천집(擅執) 하다가 같은해 9월 16일에 별세하니 향년 38세다.
1455년 11월 11일에 출생하여 1492년 9월 16일에 별세하고 동년(同年) 11월 5일에 장례하였다. 묘(墓)는 경기도(京幾道) 용인시(龍仁市) 포곡면(蒲谷面) 개곡리(介谷里) 외조부 묘 서편의 자좌(子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