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국헌(國憲). 고려말 대제학(大提學) 김진문(金振門)의 6세손이며, 조부는 증통례(贈通禮) 김한성(金漢城)이고, 부친은 김사종(金嗣宗). 1564년(명종 19) 무과(武科)에 급제한 뒤, 훈련원참군(訓練院參軍)을 거쳐 거제부사(巨濟府使)를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향리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전라좌수군절도사(全羅左水軍節度使)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종군하였다. 한산도(閑山島) 전투에서 아들 원종공신(原從功臣) 선전관(宣傳官) 김함(金涵)과 선봉에서 용감히 싸우며 도망하는 왜적을 추적하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아들 김함 또한 아버지의 죽음을 일소(一笑)에 부치고 싸우다 전사하니 충국(忠國)의 본보기가 되었다. 뒤에 임진왜란에서 세운 공(功)을 인정받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올랐다. 전남 영암군 서호면(西湖面) 운호사(雲湖祠)에 주벽(主壁)으로 배향되었으며, 1988년 창사한 충효사(忠孝祠 : 전남 영암군 학산면 소재)에 김극희, 김함 부자를 향사(享祀)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향리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전라좌수군절도사(全羅左水軍節度使)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종군하였다. 한산도(閑山島) 전투에서 아들 원종공신(原從功臣) 선전관(宣傳官) 김함(金涵)과 선봉에서 용감히 싸우며 도망하는 왜적을 추적하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아들 김함 또한 아버지의 죽음을 일소(一笑)에 부치고 싸우다 전사하니 충국(忠國)의 본보기가 되었다. 뒤에 임진왜란에서 세운 공(功)을 인정받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올랐다. 전남 영암군 서호면(西湖面) 운호사(雲湖祠)에 주벽(主壁)으로 배향되었으며, 1988년 창사한 충효사(忠孝祠 : 전남 영암군 학산면 소재)에 김극희, 김함 부자를 향사(享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