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교 창시자. 본명은 문용명(文龍明). 1920년 2월 25일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문촌에서 6남 7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형 문용수의 기독교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증조부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문윤국(文潤國) 목사로 3.1 독립운동 평안북도 총책임자로 오산학교를 중심으로 시위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렀다. 그 이후로도 문윤국은 피신을 다니다 강원도 정선에서 생을 마감하였는데, 집안재산을 모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내어 가계가 파산하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서울에서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를 졸업한 뒤 일본 와세다대학교 부설 고등공업학교 전기과를 다녔다.
8.15 해방후인 1946년 8월 평양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사회질서문란 혐의로 체포되어 수감된 뒤 3개월 만에 풀려났다. 이후로도 신비주의 선교 활동을 하다가 1948년 2월 다시 체포되어 수감되었으며, 6.25전쟁 중인 1950년 10월 국군의 진격으로 형무소에서 풀려나 월남하였다. 1951년 부산 범내골에서 작은 토담집 교회로 시작하여 1954년에는 서울로 올라와 성북구 북학동에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통일교회)를 창립하고 전도 활동을 전개하였다.
1957년에는 '원리강론(原理講論)'을 완성하여 통일교의 교리 체계를 갖추고, 다음의 6가지 신조를 확립하였다.
① 유일신인 창조주 하느님을 인간의 아버지로 믿는다.
② 신약, 구약 성서를 경전으로 받든다.
③ 하느님의 독생자인 예수를 인간의 구주(救主)인 동시에 복귀된 선(善)의 조상으로 믿는다.
④ 예수가 한국에 재림할 것을 믿는다.
⑤ 인류세계가 재림하는 예수를 중심으로 하나의 대가족사회가 될 것을 믿는다.
⑥ 하느님의 구원 섭리의 최종목표는 지상과 천상에서 악과 지옥을 없애고 선과 천국을 세우는 데 있음을 믿는다.
이러한 교리하에 국내 전도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1958년 이후 해외 선교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1960년 한학자(韓鶴子)와 결혼하였고, 같은해 축복식(祝福式)이라 부르는 36쌍의 합동결혼식을 올렸다. 1963년 통일교를 사회단체로 등록하고 재단법인 인가를 받았으며, 1964년 선명(鮮明)으로 개명하였다. 1968년 국제승공연합을 창설하여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등 각종 반공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71년 통일사상연구원과 주간종교사를 창립한 데 이어 1973년에는 세계평화교수아카데미를 창설하였다.
1982년에는 미국에서 보수 계열의 《워싱턴 타임스 The Washington Times》를 창간하였고, 서울 종합운동장 실내체육관에서 6000쌍의 합동결혼식을 주관하여 세계의 이목을 끌기도 하였다. 1985년 충청남도 아산에 선문대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89년에는 《세계일보(世界日報)》를 창간하였다. 1991년에는 북한의 김일성 주석을 만나 남북관계 개선에 합의하는 정치력을 보이기도 하였다.
1992년 자신과 부인 한학자가 인류를 이끄는 '참부모'라고 선포하였고, 1993년에는 세계적 메시아, 참부모를 기반으로 한 이른바 성약시대(成約時代), 곧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시대를 지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시대'를 선포하였다. 이처럼 자신을 재림한 메시아이자 인류의 참부모로 받드는 통일교의 교리 때문에 이단(異端) 시비가 끊이지 않았으며, 이승만정권 이후 6차례에 걸쳐 수감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2009년 1월 일곱째 아들 문형진(文亨進)을 후계자로 공식 지명하였으며, 2012년 9월 3일 92세에 감기와 폐렴으로 인한 합병증세로 사망하였다.
미국 리커대학교와 버디언대학교, 아르헨티나 라플라타대학교에서 명예박사를, 미국 성서신학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를, 브라질 국민문화공로십자훈장 등을 받았으며, 저서에 자서전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가 있다.
형 문용수의 기독교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증조부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문윤국(文潤國) 목사로 3.1 독립운동 평안북도 총책임자로 오산학교를 중심으로 시위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렀다. 그 이후로도 문윤국은 피신을 다니다 강원도 정선에서 생을 마감하였는데, 집안재산을 모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내어 가계가 파산하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서울에서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를 졸업한 뒤 일본 와세다대학교 부설 고등공업학교 전기과를 다녔다.
8.15 해방후인 1946년 8월 평양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사회질서문란 혐의로 체포되어 수감된 뒤 3개월 만에 풀려났다. 이후로도 신비주의 선교 활동을 하다가 1948년 2월 다시 체포되어 수감되었으며, 6.25전쟁 중인 1950년 10월 국군의 진격으로 형무소에서 풀려나 월남하였다. 1951년 부산 범내골에서 작은 토담집 교회로 시작하여 1954년에는 서울로 올라와 성북구 북학동에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통일교회)를 창립하고 전도 활동을 전개하였다.
1957년에는 '원리강론(原理講論)'을 완성하여 통일교의 교리 체계를 갖추고, 다음의 6가지 신조를 확립하였다.
① 유일신인 창조주 하느님을 인간의 아버지로 믿는다.
② 신약, 구약 성서를 경전으로 받든다.
③ 하느님의 독생자인 예수를 인간의 구주(救主)인 동시에 복귀된 선(善)의 조상으로 믿는다.
④ 예수가 한국에 재림할 것을 믿는다.
⑤ 인류세계가 재림하는 예수를 중심으로 하나의 대가족사회가 될 것을 믿는다.
⑥ 하느님의 구원 섭리의 최종목표는 지상과 천상에서 악과 지옥을 없애고 선과 천국을 세우는 데 있음을 믿는다.
이러한 교리하에 국내 전도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1958년 이후 해외 선교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1960년 한학자(韓鶴子)와 결혼하였고, 같은해 축복식(祝福式)이라 부르는 36쌍의 합동결혼식을 올렸다. 1963년 통일교를 사회단체로 등록하고 재단법인 인가를 받았으며, 1964년 선명(鮮明)으로 개명하였다. 1968년 국제승공연합을 창설하여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등 각종 반공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71년 통일사상연구원과 주간종교사를 창립한 데 이어 1973년에는 세계평화교수아카데미를 창설하였다.
1982년에는 미국에서 보수 계열의 《워싱턴 타임스 The Washington Times》를 창간하였고, 서울 종합운동장 실내체육관에서 6000쌍의 합동결혼식을 주관하여 세계의 이목을 끌기도 하였다. 1985년 충청남도 아산에 선문대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89년에는 《세계일보(世界日報)》를 창간하였다. 1991년에는 북한의 김일성 주석을 만나 남북관계 개선에 합의하는 정치력을 보이기도 하였다.
1992년 자신과 부인 한학자가 인류를 이끄는 '참부모'라고 선포하였고, 1993년에는 세계적 메시아, 참부모를 기반으로 한 이른바 성약시대(成約時代), 곧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시대를 지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시대'를 선포하였다. 이처럼 자신을 재림한 메시아이자 인류의 참부모로 받드는 통일교의 교리 때문에 이단(異端) 시비가 끊이지 않았으며, 이승만정권 이후 6차례에 걸쳐 수감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2009년 1월 일곱째 아들 문형진(文亨進)을 후계자로 공식 지명하였으며, 2012년 9월 3일 92세에 감기와 폐렴으로 인한 합병증세로 사망하였다.
미국 리커대학교와 버디언대학교, 아르헨티나 라플라타대학교에서 명예박사를, 미국 성서신학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를, 브라질 국민문화공로십자훈장 등을 받았으며, 저서에 자서전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