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대 국무총리. 포스코 창립자. 정치인. 호는 청암(靑岩). 1927년 9월 29일 경상남도 양산에서 아버지 박봉관과 어머니 김소순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3년 9월 6세 때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뒤 그곳에서 다가심상소학교(1934년 입학), 이야마북중학교(1940년 입학), 와세다대학 기계공학과(1945년 입학)를 다녔다. 1945년 해방이 되자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1948년 육군사관학교(6기)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한 뒤 6.25전쟁에 참전하였고, 1961년 5.16군사정변 후 박정희(朴正熙) 군사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비서실장으로 발탁되었다. 1963년 단국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같은 해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뒤 1964년 대한중석(지금의 대구텍) 사장을 지냈다.
1968년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종합제철소를 건설하라는 지시를 받고 포항종합제철(지금의 포스코)을 창립하여 초대 사장으로 취임, 제철보국(製鐵報國, 철을 만들어 나라에 보답한다)을 내걸고 1973년 6월 종합제철 일관공정을 완공시켰다. 포스코 역사 40년 중 26년을 CEO로 일한 그는 1992년 명예회장이 되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포항제철을 연간 2100만t의 생산능력을 가진 세계 3위 철강사에 올려놓았다. 전 세계 주요 인사들이 고인을 가리켜 '미국 카네기를 뛰어넘는 철강왕'이라 평할 정도로 철강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1980년 전두환 정부 때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입법회의에 경제분과위원장으로 참여하면서 정계에 입문하여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민주정의당, 전국구)이 된 뒤 국회 재무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고,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한일의원연맹 한국측 회장,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1990년 민주자유당 최고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 후보 진영과 대립하다가 민자당을 탈당한 뒤 1993년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포항종합제철 명예회장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997년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정계에 복귀한 뒤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여 총재가 되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에는 32대 국무총리로 취임하였으나,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을 받고 재임 4개월 만에 사임하였다. 2008년 6월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하였으며, 2011년 12월 13일 급성 폐 손상으로 치료를 받다가 사망한 뒤 사회장을 치르고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지금의 포스코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워내 한국의 '철강왕'으로 불리면서 1987년 영국금속학회가 수여하는 베서머 금상에 이어 1992년 세계 철강업계에 공이 큰 인사에게 수여하는 윌리코프상을 받기도 하였다. 1975~1990년 한국철강협회 회장, 1980~1981 한일의원연맹 회장, 1981년 한일경제협의회 회장, 1988~1993 한일경제협회 명예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또 교육에도 관심이 많아 1971년 포스코청암재단의 토대가 된 제철장학회를 설립하였고, 1986년 포항공과대학교를 세웠다.
주요 상훈으로는 충무무공훈장(1950, 1952), 화랑무공훈장(1951, 1953, 1954), 국민훈장 무궁화장(1974), 레종도뇌르훈장(1990), 노르웨이국왕훈장(1991), 한국경영자대상(1992) 등을 수상하였으며, 사후 청조근정훈장이 추서되었다. 이밖에 1988년 미국 카네기맬런대학교 공학 명예박사학위, 영국 셰필드대학교 금속공학 명예박사학위, 1992년 모스크바대학교 경제학 명예박사학위 등을 받았다. 저서로는 '신종이산가족'(1987)이 있다.
1933년 9월 6세 때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뒤 그곳에서 다가심상소학교(1934년 입학), 이야마북중학교(1940년 입학), 와세다대학 기계공학과(1945년 입학)를 다녔다. 1945년 해방이 되자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1948년 육군사관학교(6기)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한 뒤 6.25전쟁에 참전하였고, 1961년 5.16군사정변 후 박정희(朴正熙) 군사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비서실장으로 발탁되었다. 1963년 단국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같은 해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뒤 1964년 대한중석(지금의 대구텍) 사장을 지냈다.
1968년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종합제철소를 건설하라는 지시를 받고 포항종합제철(지금의 포스코)을 창립하여 초대 사장으로 취임, 제철보국(製鐵報國, 철을 만들어 나라에 보답한다)을 내걸고 1973년 6월 종합제철 일관공정을 완공시켰다. 포스코 역사 40년 중 26년을 CEO로 일한 그는 1992년 명예회장이 되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포항제철을 연간 2100만t의 생산능력을 가진 세계 3위 철강사에 올려놓았다. 전 세계 주요 인사들이 고인을 가리켜 '미국 카네기를 뛰어넘는 철강왕'이라 평할 정도로 철강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1980년 전두환 정부 때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입법회의에 경제분과위원장으로 참여하면서 정계에 입문하여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민주정의당, 전국구)이 된 뒤 국회 재무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고,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한일의원연맹 한국측 회장,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1990년 민주자유당 최고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 후보 진영과 대립하다가 민자당을 탈당한 뒤 1993년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포항종합제철 명예회장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997년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정계에 복귀한 뒤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여 총재가 되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에는 32대 국무총리로 취임하였으나,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을 받고 재임 4개월 만에 사임하였다. 2008년 6월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하였으며, 2011년 12월 13일 급성 폐 손상으로 치료를 받다가 사망한 뒤 사회장을 치르고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지금의 포스코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워내 한국의 '철강왕'으로 불리면서 1987년 영국금속학회가 수여하는 베서머 금상에 이어 1992년 세계 철강업계에 공이 큰 인사에게 수여하는 윌리코프상을 받기도 하였다. 1975~1990년 한국철강협회 회장, 1980~1981 한일의원연맹 회장, 1981년 한일경제협의회 회장, 1988~1993 한일경제협회 명예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또 교육에도 관심이 많아 1971년 포스코청암재단의 토대가 된 제철장학회를 설립하였고, 1986년 포항공과대학교를 세웠다.
주요 상훈으로는 충무무공훈장(1950, 1952), 화랑무공훈장(1951, 1953, 1954), 국민훈장 무궁화장(1974), 레종도뇌르훈장(1990), 노르웨이국왕훈장(1991), 한국경영자대상(1992) 등을 수상하였으며, 사후 청조근정훈장이 추서되었다. 이밖에 1988년 미국 카네기맬런대학교 공학 명예박사학위, 영국 셰필드대학교 금속공학 명예박사학위, 1992년 모스크바대학교 경제학 명예박사학위 등을 받았다. 저서로는 '신종이산가족'(1987)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