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5년(광해군 7)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에 57위로 합격하였다. 광해군 때 과거 시험을 보러 한양에 갔을 때, 당시 대북파의 거두 이이첨(李爾瞻)이 도덕군자로 소문난 그를 만나보기 위해 시험장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김관(金灌)은 임해군(臨海君)‧유영경(柳永慶) 등을 폐출시키고 강화부사(江華府使)를 시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게 만든 이이첨을 만나고 싶지 않아 그 자리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독서에 전념하면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1627년(인조 5년) 후금이 쳐들어와서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소모사(召募使) 직을 맡고 있던 문원공(文元公) 사계(沙溪) 김장생을 만나러 갔다. 이때 김장생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七寶面) 무성리(武城里)에 있는 무성서원(武城書院)에 최치원(崔致遠)‧신잠(申潛)‧정극인(丁克仁)‧안세림(安世琳)‧정언충(鄭彦忠)‧김약묵(金若黙) 등과 함께 배향되었다.
조선 개국원종일등공신(開國原從一等功臣) 충민공(忠敏公) 김회련(金懷鍊)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한정(閒亭) 김약회(金若晦)이고, 조부는 쌍백당(雙栢堂) 김원(金元)이며, 부친은 선무랑(宣務郞)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 김대립(金大立)이다.
1615년(광해군 7)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에 57위로 합격하였다. 광해군 때 과거 시험을 보러 한양에 갔을 때, 당시 대북파의 거두 이이첨(李爾瞻)이 도덕군자로 소문난 그를 만나보기 위해 시험장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김관(金灌)은 임해군(臨海君)‧유영경(柳永慶) 등을 폐출시키고 강화부사(江華府使)를 시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게 만든 이이첨을 만나고 싶지 않아 그 자리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독서에 전념하면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1627년(인조 5년) 후금이 쳐들어와서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소모사(召募使) 직을 맡고 있던 문원공(文元公) 사계(沙溪) 김장생을 만나러 갔다. 이때 김장생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七寶面) 무성리(武城里)에 있는 무성서원(武城書院)에 최치원(崔致遠)‧신잠(申潛)‧정극인(丁克仁)‧안세림(安世琳)‧정언충(鄭彦忠)‧김약묵(金若黙) 등과 함께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