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중국성운학자(中國聲韻學者). 자는 공서(公瑞). 사역원정(司譯院正) 정발(正潑)의 아들이다. 1473년(성종 4) 전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출생지는 서울 인듯하다. 한어(漢語), 이문(吏文), 중국어에 능통하였다. 1502년(연산군 8) 8월에 봉세자별시(封世子別試)에 2등으로 급제, 그뒤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 질정관(質正官), 군자감정(軍資監正), 절충장군 충무위부호군(折衝將軍忠武衛副護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오위장(五衛將), 상장군(上將軍), 승문원제조(承文院提調), 절충장군 의흥위부호군(折衝將軍義興衛副護軍) 등을 거쳐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능통한 중국어와 이문 실력 때문에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통역을 담당하여 왕의 신임을 받았다. 그가 중인 출신이라 때로는 당시 양반들의 비난을 받았으나 그때마다 중종과 좌의정 남곤(南袞)의 변호로 고비를 넘겼다. 40여년간에 걸쳐 저작 7종과 번역, 언해 10종을 합쳐 모두 17종의 저술을 남겼다. 그 중에서 오늘날 매우 중요한 자료는 '사성통해 四聲通解', '번역노걸대 飜譯老乞大', '번역박통사 飜譯朴通事', '훈몽자회 訓蒙字會', '이문집람 吏文輯覽' 등으로, 이들 저술은 16세기 초기, 중기 국어와 한자음 및 중국어학에 관한 것들이다. 그가 남긴 중요한 업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중국어 교과서인 '번역노걸대'와 '번역박통사'에 번역된 문장은 당시 국어의 구조를 정리, 파악한 것이며, 풍부한 어휘가 실려 있다. ② 중국한자음용 운서(韻書)인 '사성통해'에는 '홍무정운역훈 洪武正韻譯訓'에서 옮겨 적은 정음(正音)과 속음(俗音)외에 당대의 시음(時音)인 금속음(今俗音)도 기록되어 있다. ③ '훈몽자회'(상, 중, 하)는 아동들에게 한자의 음과 뜻을 실물을 통하여 정확히 가르치기 위하여 상권, 중권에 전실(全實)글자를, 하권에 잡어(雜語)라 하여 반실반허자를 실었다. 또, 한글 실용화와 옛말연구의 귀한 책이다. ④ '이문집람'은 이문 가운데 난해한 것을 해석하여 편찬한 것이다. 그리고 주석 뒷부분에 자신이 실제로 경험한 이문들을 엮고 해설한 것을 '속이문(續吏文)'이라 하여 실었다. 당시 외교문서 작성의 지침서가 되게 하였다. 그의 학문은 어디까지나 실용성을 존중한 것으로, 그는 응용언어학자라 하겠다. 그가 누구의 문인으로서 학문을 전수받았는지는 문헌 기록이 없으나, '사성통고'와 '사성통해'의 관계를 고려하여 생각할 때 책을 통하여 신숙주(申叔舟) 에게서 영향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교우관계는 봉세자 별시의 동방(同榜)급제자인 김안국(金安國)과 가까웠으며, 이들 사이에는 인간적인 교제 외에 학문적 상호 영향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그의 저서나 역서로 '친영의주언해 親迎儀註諺解', '책빈의주언해 ○嬪儀註諺解', '황극경세서집람 皇極經世書集覽', '번역여훈 飜譯女訓', '운회옥편 韻會玉篇' 및 '소학편몽 小學便蒙' 4권, '대유대주의 大儒大奏議' 2권, '황극경세설 皇極經世說' 12권, '경성도지 京城圖志' 1책, '여효경 女孝經' 1책, '지도 地圖' 1축(軸), '속첨홍무정운 續添洪武正韻', '언해효경 諺解孝經'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