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효자. 자는 입지(立支). 호는 전귀당(全歸堂). 어려서부터 조부모 및 부모 섬기기에 지극한 정성을 다하였으니, 어떠한 음식이라도 반드시 맛을 보고 드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성을 지키기 위하여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집을 떠나자 15살 어린 나이로 홀로 집에 남아서 조상의 사당을 지켰고, 할머니와 어머니를 모시고 공산(公山)의 삼성암(三省菴)에 피난하였다. 정유재란 때는 산속에 피신시키고 걸어서 동래 까지 왕래하면서 쌀을 구하여 부모를 공양하였다. 부사가 이를 가련하게 여겨 이웃 고을의 세미(稅米)를 바꾸어주었다. 당시 이호민(李好閔)이 그 지역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 효행의 지극함에 감동하여 진상할 밀과(蜜果), 어육(魚肉) 등을 내려 할머니를 봉양하게 하고, '全歸(전귀)'의 두자로써 당호(堂號)하게 하였다. 전란으로 학문을 못다한 것을 탄식하면서 서사원(徐思遠), 정구(鄭逑),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벼슬은 참봉에 이르렀다. 좌랑에 증직되고 대구 백원서원(百源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