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이범익(李範益)
  • 전주이씨(全州李氏),  출생~사망 : 1883 ~ ?
조선 후기의 친일파. 부친은 이원하(李瑗夏)이고, 처는 홍승오(洪承五)의 딸 홍순자(洪順子)이다.

충북 단양 출신으로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고, 1903년 외국어학교 일어보통과를 졸업하고, 외국어학교의 교관, 일본 육군성 육군통역, 보광학교 교사, 경성박람회 고문과 심사관 등을 거쳐 농공상 서기관이 되었다.이 때 농상공부대신인 매국노 송병준의 비서관이 되어 함께 일본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 후 춘천(春川), 김해(金海), 예천(醴泉), 달성(達城), 칠곡(漆谷) 등의 군수를 지냈다.

1923년에 일제 조선총독부 사무관을 거쳐 황해도 내무부장과 경상남도 참사관, 강원현의 현장, 충청남도도지사 등을 역임했다. 1932년 11월부터 한국 국민을 노예로 만들기 위해 전개한 자력갱생운동인 정신작흥운동(精神作興運動)에 강원도도지사가 되어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황국신민화정책에 박차를 가했다.

1935년에 중추원 참의원과 동양척식회사의 감사직을 거쳐, 1937년 7월에 만주의 초대 간도(間島) 성장으로 임명되었다. 간도 성장으로 취임 후 만주제국 정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치안유지를 강화하여 항일 무장 세력과 그 가족들에 대한 포위 토벌과 박해를 감행하였다.

1938년 9월 15일 일제 조선총독부에 조선청년들로 결성된 특설부대를 간도에 조직할 것을 제의하여 간도성 특별 부대를 설치하였다. 이와 함께 관동군사령부 및 만주국군과 합동으로 간도 일대의 항일무장 역량에 대한 포위토벌을 진행하였다. 더불어 만주 제국 조선척식회사에 의뢰하여 만주 지역으로의 우리 민족 이민 활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또 성내에 있는 산림과 광산자원에 대해 전면적인 조사를 진행하고 자원보유량에 대한 적극적인 조사를 벌이고, 탄광의 채굴, 농업합작사를 증설하여 농촌경제에 대한 공제를 강화하는 등 일제에게 자원 약탈의 조건을 제공하였다.

한편 그는 각종 언론기관과 간도성 협화회 조직을 이용하여 일본 - 만주 친선, 일본 - 조선 일체 등을 선전하여 우리민족을 기만하고 사상통제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학교에 일본인 교원을 증원하고 일본어 수업을 보급하고 왜곡된 교과서도 편찬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학생들에게 노예화 교육을 강화하여 우민교육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시도한 일제 식민 정책의 일환이었고, 그는 대표적인 꼭두각시 인물이었다. 1940년 5월에 만주제국 참의부 참의로 취임하였지만 광복 후에 간도 부성장 윤태동(尹泰東)과 함께 소련 홍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