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인. 자는 희숙(禧叔). 호는 선주(仙舟) 또는 청죽(聽竹). 1708년(숙종 34) 진사가 되었으나 관에 나아가지 않았고, 사옹원봉사를 지냈다고 '의령남씨세보'에 적혀 있으나 실직(實職)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그가 출세할 수 없었던 것은 작은 할아버지 치훈(致熏)이 1689년 기사환국 때 세자책봉이 시기상조라고 반대한 송시열(宋時烈)을 탄핵한 적이 있는데, 이후 노론정권시대로 들어가면서 소론계였던 집안의 관로가 막혔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러나 태응은 '청죽만록 聽竹漫錄'이라는 8권의 문집을 저술할 정도로 높은 학식과 교양을 갖추었으며, 특히 그의 문집 중 '청죽화사 聽竹畵史)'는 조선시대 화론 중에서 가장 뛰어난 비평적 견해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대 숙종 연간에 활약한 정보를 담고 있는 글이다. 따라서, 태응은 동시대에 볼 수 있는 은일문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묘지(墓誌)는 참판을 지낸 이정작(李庭綽)이 썼다고 족보에 기록되어 있으나 태응에 대한 더 이상의 행적은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그의 문집 '청죽만록'은 육필 미간본으로 아직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통문관은 외전 8책 중 6책만을 소장하고 있고 나머지 2책의 행방은 알 수 없다.이 책은 이괄(李适)의 난 시말기(始末記) 등 정치적, 사회적 사건의 자초지종과 그것에 대한 자신의 소견을 수필형식으로 쓴 것이며, 별책으로 구성된 '청죽별지 聽竹別識'에는 청죽납피잡지(聽竹衲被雜識), 논동방문장(論東方文章), 화사(畵史), 삼화가유평(三畵家踰評), 화사보록상(畵史補錄上), 화사보록하(畵史補錄下) 등 문장론(文章論)과 화사(畵史)에 관한 글이 많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