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인. 자는 조원(調 元). 호는 옥소(玉所), 백취옹(百趣翁), 무명옹(無名翁), 천남거사(泉南居士). 서울 출생. 집의(執義) 격(格)의 손자로, 증이조참판 상명(尙明)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용인이씨(龍仁李氏)로 좌의정 세백(世白)의 딸이다. 아우는 대사간 형(螢)이다. 큰아버지는 학자 상하(尙夏)이며 작은아버지는 이조판서 상유(尙遊)이다. 어머니는 현철한 분으로 그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16세에 경주이씨(慶州 李氏) 이조참판 세필(世弼)의 딸과 혼인하였다. 14세에 아버지와 사별하였기 때문에 큰아버지의 각별한 보살핌과 훈도를 받으며 수학하는 한편, 외숙인 영의정 이의현(李宜顯), 처남인 좌의정 이태좌(李台佐) 등과 함께 면학하기도 하였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때는 19세로 소두(疏頭)가 되어 상소를 올리는 등 한때 시사에 관심을 가지기도 하였으나, 송시열(宋時烈)을 위시한 주변인물들의 사사(賜死) 내지는 유배의 참극을 겪은 뒤로는, 관계(官界) 진출의 길보다는 문필쪽을 택하였다. 일생을 전국 방방곡곡 명승지를 찾아서 탐승(探勝) 여행을 하며 보고 겪은 바를 문학작품으로 승화시켰다. 따라서 그의 작품세계는 내용이 다양하고 사실적이며 깊이가 있다. 거기에다가 폭넓은 대인관계는 다른 이의 작품에서 보기 드문 특성을 내포하고 있다. 문학을 생활화하였기 때문에 그의 문필유산 속에는 한시, 시조, 가사 작품 외에도 유행록(遊行錄), 기몽설(記夢說) 등이 있어 그 내용이 광범위하고 섬세함을 말해주고 있다. 시 유고만 해도 방대한 양을 남기고 있어 오늘에 전하는 것만도 한시 3, 000여수, 시조 75수, 가사 2편이 된다. 시조 75수는 연시조로 이루어진 작품들이 많아 그의 창작자세가 진지하였음을 말해주고 있으며, '황강구곡가 黃江九曲歌'는 주자의 '무이도가 武夷櫂歌'와 이이(李珥)의 '고산구곡가 高山九曲歌'의 맥을 이은 작품으로 시사적 의의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1704년에 지은 기행가사 '영삼별곡 寧三別曲'과 1748년에 지은 '도통가 道統歌'는 각기 특성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그의 시 특성은 주제, 소재, 시어, 기법면에서 모두 파격적 참신함을 보여준 점에서 평가된다. 전통의 터전 위에 서서 새롭게 열리는 근대기를 내다보면서 새로운 시세계를 창조해낸 점이나, 시기적으로 정철(鄭澈), 박인로(朴仁老), 윤선도(尹善道)의 시가 주맥(主脈)을 이은 점에서 그가 점유하는 비중은 크다. 말년에 가의대부(嘉義大夫)의 예우를 받았다. 저서로는 간행본 '옥소집 玉所集'(13권 7책)과 필사본 '옥소고 玉所稿'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