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인. 자는 미백(美伯). 호는 양정당(養正堂). 현감 세영(世榮)의 아들이며,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학행(學行)으로 민정중(閔鼎重), 김수흥(金壽興) 등의 천거를 받아 현릉참봉(顯陵參奉)이 되었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가 남인의 주장으로 폐위되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한 스승 송시열이 세자 책봉문제로 사사(賜死)되자 동지들과 함께 신원(伸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고향 양주로 돌아갔다. 뒤에 서인이 집권하면서 1701년 광릉참봉(光陵參奉)으로 다시 기용되고, 세자익위사의 시직(侍直), 부수(副率), 상의원첨정(尙衣院僉正) 등을 역임하고, 80세 때 노인직으로 지중추부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