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인, 학자. 자는 군평(君平). 호는 동명(東溟). 아버지는 호조좌랑을 지낸 회(晦)이며, 어머니는 광주정씨(光州鄭氏)로 사헌부장령 이주(以周)의 딸이다. 이항복(李恒福)의 문인이다. 할아버지 지승(之升)과 증조부 담, 종증조부 염(○○), 작은 모두 시인으로 이름이 났다. 14세 때 별시 초선(初選)에 합격하여 문명을 떨쳤다. 1626년(인조 4) 문학으로 이름있는 중국의 사신이 왔을 때 그는 벼슬없는 선비로서 부름을 받아 김류(金○) 등과 함께 중국 사신을 접대하였다. 1629년 별시문과에 장원, 부수찬, 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이때 북방의 호족(胡族)인 청나라가 강성하여지자 '완급론 緩急論'을 지어 무비(武備)의 급함을 강조하였다. 병자호란 때 척화, 강화의 양론이 분분하자, 그는 10조(條)의 소를 올려 대책을 강조하고, 또 '어적십난 禦敵十難'이라는 글을 지어 올렸으나 조정에서 채택하지 않았다. 그뒤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고 '법편 法篇', '징편 懲篇' 등 2편의 풍시(諷詩)를 지었다. 효종이 즉위하자 임금이 하여야 할 절실한 도리를 27편의 풍시로 지어올려 효종 으로부터 호피(虎皮)를 하사받았다. 그뒤 1656년(효종 7)에 '칠조소 七條疏'와 '원이설 原理說'을 지어 올렸다. 1669년(현종 10) 홍문관제학을 거쳐 예조참판, 공조참판 겸 승문원제조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노병으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조판서, 대제학을 추증하였다. 저서로는 '동명집' 26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