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의 문인. 호는 야족당(也足堂) 또는 예미(曳尾). 좌의정 세겸(世謙)의 서손(庶孫)이며, 감찰(監察) 맹렴(孟濂)의 서자이고, 평릉찰방(平陵察訪) 숙정(叔貞)의 아우이다. 1525년(중종 20) 남곤(南袞)의 청으로 설치된 이문학관(吏文學官)에 참여하여 최세진(崔世珍)에게 수업하였다. 이때 비슷한 처지의 민개(珉介, 또는 天諒子), 이숙(李叔) 등과 교유하였다. 1533년 하절사(夏節使)를 따라 중국에 다녀왔다. 1536년에 원영사(遠迎使) 소세양(蘇世讓)을 따라 의주에 머물며 시를 논하였다. 1537년에 이문학관으로서 중국사신을 수행하였는데, 중국사신이 '학관' 칭호를 '학교의 관(官)'으로 오인하여 증시(贈詩)하였다는 일화를 남겼다. 1540년 교서관(校書館)의 감교관(監校官)으로 있었다. 김안국(金安國)의 청으로 찬집국(纂集局)이 설치되어 '이문제서집람 吏文諸書集覽'을 편하는 데 참여하여 이문(吏文), 속이문(續吏文)을 찬하였으나, 그 책은 현전하지 않는다. 1541년 김안국의 건의로 문과와 같은 제도를 갖춘 한리과(漢吏科)가 설치되어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김안국이 죽자 한리과는 폐지되고 말았다. 같은해에 하절사를 따라 재차 중국에 다녀왔다. 1554년(명종 9) '제왕역년기 帝王曆年記' 및 '요집 要集'의 소략하고 상세함이 한결같지 않음을 보고는 이들을 참조하여 '고사촬요 攷事撮要' 3권을 지었다. 당시 영의정 인 심연원(沈連源)과 대제학 정사룡(鄭士龍) 등의 주선으로이 책을 주국(鑄局)에서 인행(印行)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외국어에 능하여 외교에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박학하고 문장에 뛰어나 시평, 시론에 일가를 이루어 이이(李珥)를 가르칠 정도였으나, 미천한 출신이어서 끝내 현달하지 못하고 말았다. 별묘(別廟)는 서울특별시 강동구 고덕동에 있다. 그밖에 저술로는 '패관잡기 稗官雜記' 6권이 있는데, '대동야승'과 '해동야언 海東野言'에 수록되어 일부만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