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통역관. 자는 자화(子和). 1593년(선조 26) 통역관으로서 명나라 심유경(沈惟敬)의 수행통사(隨行通事)가 되어 진주, 부산 등지의 적진에 출입하였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평교섭이 전개되고 있을 때 통신사 황신(黃愼)을 수행하여 양방형(楊邦亨), 심유경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기도 하였다. 심유경의 통사로 활약하면서도 심유경과 웅정동(熊正東)의 은(銀)의 토색요구를 거부하여 미움을 받은 일이 있을 정도로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이 탁월하였다는 평을 받았다. 그뒤 후진교육에 힘썼으며 관은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