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지사(志士). 자는 청지(淸之). 호는 명암(銘巖). 봉사(奉事) 충립(忠立)의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김천일(金千鎰), 고경명(高敬命)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병으로 물러났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고향 사림들의 추천으로 다시 의병장이 되어 의병 수천인을 모집하여 황산(荒山)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벼슬을 주었으나 끝내 사양하고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또다시 천안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다. 연속되는 국난으로 고을의 풍기가 문란해지자 마을의 뜻있는 노인들과 향약 7조를 제정하고 사재를 털어서 향토부흥에 헌신하였다. 운봉(雲峰)의 용암서원(龍巖書院)과 엄계서원(嚴溪書院)에 제향되었다.